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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ujin Kim Mar 26. 2022

타티아나에게 보내는 안부

뒤셀도르프에서 만난 러시아 친구


독일 뒤셀도르프에서 나의 신분은 하인리히 하이네 대학교(Heinrich Heine University of Düsseldorf) 어학당 학생이었다. 같은 반에는 독일 대학에 진학하려고 독일어를 배우는 학생들이 많이 있었다. 남편을 따라 독일에 온 나는 대학이 목적이 아니라 그 나라에서 잘 살아내기 위해 독일어를 배웠다. 한 번도 배워 본 적이 없던 독일어를 배우는 것도, 나보다 열 살 정도 어린 친구들과 같은 교실에 앉아있는 것도 모두 신기했다.


4시간의 독일어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버스 안. 내 좌석 건너편에 겨우 두 살 정도 되어 보이는 꼬마가 엄마 무릎에 앉아 신문을 양손으로 펼치고 쳐다보고 있었다. 신문을 진짜로 읽고 있는 듯한 그 당당한 모습이 너무 귀여워 '피식'하고 웃는데 내 옆에 앉아 있던 금발의 여인도 함께 웃기 시작했다. 우리 둘은 아이와 서로를 번갈아보며 귀여운 꼬마 얘기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렇게 난 러시아에서 온 타티아나를 만났다.


지난 몇 년 동안 전 세계인이 코로나로 힘든 시간을 보냈다. 그것도 모자라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여 많은 사람들을 더욱더 힘들게 하고 있다. 기가 막힐 노릇이다. 얼마 전 러시아 국영방송 뉴스 시간에 뛰어들어 No War를 외친 용감한 여인이 감옥에 갇히지 않을까 걱정했었는데 벌금형을 선고받고 석방되었다고 한다. 다행이었다. 


푸틴 대통령이 일으킨 전쟁 때문에 우크라이나 국민들이 누구보다 더 많은 아픔을 견뎌내야 하겠지만 해외에 있는 러시아인들 역시 국가 이미지 때문에 영향을 받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민자들은 본국의 이미지에 따라 이민국에서 다른 대접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코로나 때문에 세계 곳곳에서 이유 없이 폭행을 당했던 아시아인들처럼. 이런 생각을 하다 16년 전 인연을 맺었던 친구 타티아나가 생각났다.


러시아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던 타티아나는 프랑스에서 모델로 일하다가 대학원 진학을 위해 터기로 갔다고 했다. 그곳에서 무엇을 공부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우연히 덴마크인 남편을 만나 결혼하고 독일에 살고 있었다. 그녀와 나는 국제결혼을 했다는 점과 독일에서 이방인이라는 공통점으로 금방 가까워졌다.

독일어 상급반을 다니고 있던 타티아나는 독일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했지만, 독일어를 배운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나는 아직 독일어로 의사소통을 할 수 없어 우리는 영어로 대화를 나눴다. 결혼은 했지만 둘 다 아직 아이가 없었고, 다양한 언어를 배우는 것을 좋아했던 우리는 서로의 경험과 음식을 나누며 외국에서 이런 인연을 만난 것에 감사했다.


이석원 작가는 그의 산문집 『언제 들어도 좋은 말』에서 이런 말을 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일은 세계와 세계가 만나는 일.

그래서 나는 사람을 만날 때 그 사람의 세계가 넓길 바란다.

내가 들여다볼 곳이 많은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나눌 수 있는 것들이 많은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와닿는 말이었다. 얘기를 할수록 담고 있는 세계가 넓어 더 알고 싶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닌 사람도 분명히 있다. 타티아나는 러시아, 터키, 덴마크의 세계를 담고 열심히 살아가는 흥미로운 사람이었다. 나는 독일 생활을 통해 또 친구를 통해 나의 세계를 조금씩 넓혀가고 있었다.


10개월의 어학 코스를 마치고 빌리히(Willich)라는 도시에 있는 LG Display 지사에 취직했다. 독일어를 아직 잘하지 못했지만 한국 회사의 지사였기 때문에 한국어와 영어를 구사하니 취직하는데 문제는 없었다. 회사를 일 년 정도 다녔을 때 첫아이 계획을 세우면서 타티아나에게 알렸다.


"타티아나, 나 이제 아이를 한번 가져보려고 해."


이 이야기를 들은 타티아나는 아무런 고민도 없이, 남편과 상의도 하지 않은 채 나에게 말했다.


"정말? 그럼 나도 가질래!"


그렇게 나는 계획한 대로 첫아이를 가졌고, 타티아나도 석 달 후에 첫아이를 가졌다. 우리는 다음 해 둘 다 건강한 아들을 낳았다. 내가 아들을 낳은 후 남편 직장 때문에 타티아나가 먼저 뒤셀도르프에서 덴마크 국경 쪽으로 이사를 갔고, 타티아나의 아들을 사진으로만 만나볼 수 있었다. 그 이후 나는 하이델베르크 근처의 바인하임이라는 도시로 이사를 했다. 아들이 예쁘고 건강하게 자라고 있었고 슬슬 둘째를 생각할 시기가 되었다. 두 살 반 터울로 둘째를 가지겠다고 계획했던 나는 타티아나에게 전화로 계획을 얘기했다.


"타티아나, 난 두 살 반 정도의 터울로 둘째를 낳고 싶어. 그래야 첫째가 잘 걷고, 기저귀 뗄 때도 되고, 스스로 할 수 있는 일들도 생겨서 내가 좀 편할 것 같아. 첫째와 둘째가 터울이 너무 많으면 같이 놀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두 살 반 터울이 제일 좋을 것 같아."


"아 그래? 그럼, 나도 둘째를 가져야지!."


러시아에서 온 덩달이가 여기에 있었다. 남편과 상의해서 계획을 세우는 게 아니라 내가 계획을 얘기하면 그것이 이 부부의 2세 계획이 되었다. 그녀의 남편도 부인이 친구와 2세 계획을 세웠다고 기가 막힌다 하면서도 제대로 협조한 모양이다. 신기하게도 계획한 대로 두 살 반 터울로 나는 7월에 딸을 얻었고, 그녀도 8월에 딸을 얻었다.


좋은 친구는 어디에 있든 유지된다고는 하지만 거리가 멀어진 만큼, 생활환경이 다른 만큼 일상을 공유하는 깊이가 달라지면 관계도 조금씩 변하기 마련이다. 타티아나와도 서로 연락이 뜸해졌다. 다행히 페이스북이나 메신저로 간혹 소식을 전하고 있는데, 그녀는 현재 브뤼셀을 거쳐 다시 독일에서 살고 있다고 했다. 기쁜 소식은 그녀가 독일 초등학교에서 영어 선생님으로 일을 시작했다가 초등학교 담임선생님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초등학교 선생님이라면 독일어로 전 과목을 다 가르쳐야 하는데, 그 어려운 것을 외국인인 그녀가 당당히 해내고 있는 것이다. 언제나 최선을 다해 생활하던 그녀의 모습을 떠올랐다.


이민자의 삶이란 어떤 국적을 가졌든, 어느 나라에 살든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 열심히 사는 그녀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사람들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지 않았으면 한다. 한 나라의 대통령의 의견이 모든 국민의 의견은 아니기 때문이다.


타티아나, 너는 알까? 생각보다 영어가 잘 통하지 않아서, 생각보다 차가웠던 독일 사람들 때문에 간혹 당혹스럽기도 하고, 외롭기도 했던 그 시절에 네가 있어서 난 따뜻했어. 예전처럼 자주 연락은 못해도, 너는 나에게 아주 중요한 사람이야. 엄마들의 계획 아래 같은 시기에 태어났지만 서로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 우리 아이들이 언젠가 만나 같이 놀 수 있도록 그때까지 건강하게 잘 지내자.


Düsseldorf - Frank Lötfering 작품(2010 구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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