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가 있다는 건 따뜻함이고 든든함이다. 나에게는 그런 감정을 알려 준 세 살 많은 언니가 있다. 무슨 일이 있을 때 가장 먼저 찾게 되는 사람, 흔들리는 나를 듬직한 버팀목처럼 가장 잘 받쳐주는 사람이다. 서로 시기하고 싸우는 자매도 숱하게 보았지만 우리는 달랐다. 나에게 언니는 직장을 다녔던 엄마 대신이었고, 언제나 기댈 수 있는 언덕이었다. 모르는 게 있으면 언니에게 바로 달려갔다. 신기하게도 언니는 나의 질문에 다 대답해 주었고 그런 언니를 '걸어 다니는 백과사전'이라고 불렀다. 언니의 박식함과 차분함을 항상 동경했고, 우리는 대화가 통하는 사이좋은 자매였다.
우리 둘이 충돌을 일으키는 딱 한 가지 민감한 주제가 있었으니 그것은 옷이었다. 패션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옷에 상당히 신경을 썼다. 특히 무릎이 볼록 튀어나오고, 무릎 뒤가 주름지는 것을 무척이나 싫어했다. 나와 신체 지수가 비슷했던 언니가 내 옷을 빌려 입고 나갈 때면 언제나 내 바지의 무릎 부분은 만신창이가 되어 돌아왔다. 튀어나온 무릎 부분과 아코디언처럼 구겨진 무릎 뒷부분을 심폐소생술 하듯 뜨거운 스팀다리미로 다시 살려 놓지 않으면 다시 입을 수가 없었다. 뿐만 아니었다. 발이 작아 오다가다 잘도 넘어지는 언니는 내가 애지중지하던 바지에 구멍을 내오는 만행도 심심찮게 저질렀다.
고무줄놀이와 술래잡기를 하며 언제나 밖에서 놀던 나와 달리 언니는 항상 책을 읽었다. 책을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언니가 책 뒤로 숨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어른이 되어서야 알았다. 아파트로 이사를 가면서 내가 3학년, 언니가 6학년 때 우리는 새로운 학교로 전학을 갔다. 언니는 전학 간 첫날부터 공부를 무척 잘하는 아이가 왔다고 편애한 담임선생님 때문에 같은 반 아이들에게 따돌림을 당했다고 했다. 다음 해에 중학생이 되면서 문제는 스르르 해결되었지만, 아무에게 얘기하지 못하고 힘들어했을 그 시절의 언니를 생각하면 안쓰럽다. 삼 남매의 장녀로서 책임감도 막중해 동생들이 잘못하면 같이 혼났고, 엄격한 부모님으로부터 간섭도 훨씬 많이 받았다. 의무는 없고, 권리만 있던 아들과 다르게 우리 집 딸들은 제사를 지낼 때나 집안 대소사에 해야 할 의무가 많았다. 부당한 일을 많이 당해도 내색을 하지 않는 언니를 위해 가끔은 난 잔 다르크처럼 대신 싸우기도 했다. 물론 언니가 부탁한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엄마가 아플 때 언니는 아빠를 도와 엄마를 제일 많이 챙겼다. 외국에 살던 난 함께 돕지 못해 항상 미안한 마음이 있었다. 2017년 다시 한국으로 들어갔을 때 한국에 있는 동안 언니를 좀 쉬게 해 주고 싶어서 엄마가 아플 때 주로 내가 엄마에게 갔다. 엄마를 돌보는 언니의 희생과 도움을 부모님이 당연히 여길 때 난 마음이 아렸다. 엄마나 사촌 이모는 감정을 잘 표현하지 않는 언니를 곰이라 했다. 언니가 처음부터 곰은 아니었을 텐데 언젠가부터 언니는 곰이라 불리고 있었고, 장녀라는 무게를 견디며 꿋꿋이 살아가고 있었다. 겉은 부드러워 보이지만 마음이 강한 외유내강의 타입의 언니. 외유내강의 타입도 가끔 무너질 때가 있다. 버거움을 표현하지 않고 그저 마음에 쌓아 두다가 더는 감당하지 못할 때, 그들은 한없이 무너진다. 나는 언니가 잠시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릴까 봐 두렵다.
세상은 이상하게도 묵묵히 버티는 사람에게 더 큰 짐을 지운다. 장녀의 희생을 당연한 의무로 치부하는 우리 사회, 그렇게 살아와서 그게 잘못이라 생각하지 못하는 우리 부모. 힘들어하는 그 한 사람이 나의 딸이라면, 나의 누이라면, 당연하지 않은 의무에 짓눌리는 그녀를 위해 한 번쯤 다르게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나의 소중한 언니가 삶의 무게를 혼자 짊어지지 않고, 종종 나에게 덜어내며 살기를, 또 내가 언니에게 의지하듯 언니도 나에게 의지하기를. 문득 언니에게 전화를 걸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