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의 봄날
"아빠가 뭘 알아!! 내가 알아서 한다고!!!"
이제 갓 중학생이 된 딸의 날카로운 음성에 멍해있기를 잠시, '쾅'하며 방문이 닫히는 소리가 연달아 귓가를 때린다.
저 멀리서 딸에게 쩔쩔매는 남편의 모습을 지켜보던 아내는 어깨를 으쓱하며 입모양으로 작게 말한다.
'사춘긴가봐.'
아내와 씁쓸한 눈인사를 주고받고 내 방에 들어와 책상 가장 안쪽 서랍에 '열무'라고 적혀있는 커다란 상자를 하나 꺼내 앉는다.
딸이 아내의 배 속에 있을 때에, 우리는 딸을 '열무'라 불렀다. 열달동안 무럭무럭 자라나라는 뜻에서 지은 유치하지만 건강한 소망을 담은 태명이었다.
상자 안에는 내가 열무에게 적었던 편지들, 열무의 초음파 사진, 딸의 어릴 적 사진 등이 섞여 있었는데 무심코 집어 펼친 노트에는 그 옛날 내가 딸을 생각하며 꾹꾹 눌러 필사했던 한 편의 문장이 적혀 있었다.
내 껌딱지인 내 아이를 보며 가끔 생각한다.
내 인생에서, 내가 내 아이의 전부인 순간이 대체 얼마나 남아 있을까?
엄마 아빠가 삶의 전부였던 그 시간은 참 빠르게 지나더라.
겪을 때는 그렇게 힘들고 지겨웠는데, 지나고보니 그 시절이 내 삶의 봄날이었구나.
다시는 그 아름다운 시간을 만날 수 없겠지.
엄마 아빠가 전부였다가, 이제는 친구가 전부인 너,
점점 넌 우리를 떠나 살겠지.
우리는 얼마나 서로 더 멀어질까.
이제는 잠시만 안아도 내 품을 자꾸만 떠나려고만 하는 너,
엄마 아빠만 바라보던 그 시절로 다시는 돌아갈 수 없겠지.
그래도 꼭 기억해주렴.
우리가 너를 참 많이 사랑하고 아꼈다는 사실을.
많이 사랑해. 그리고 고마워.
부족한 우리에게 와줘서.
엄마, 아빠가 전부였던 그 시절의 딸이 이제는 친구가 전부가 된 모양이었다.
눌러 쓴 저 문장대로라면 머지않아 딸은 곧 우리를 떠나 살게 될 테고,
그렇게 딸과 우리는 더 멀어지게 되겠지.
센치한 저녁, 생각이 여기에까지 미치자 한없이 우울해졌다.
단 하루라도, 한 시간, 아니 단 10분 만이라도
내 껌딱지였던 너를 다시 내 품에 가득 안을 수만 있다면...
너를 가득 안으며 손과 발의 그 꿉꿉하지만 포근한 냄새, 입가에 묻어있던 분유냄새를 한껏 맡고 싶었다.
듣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고 온 세상을 다 얻은 것만 같았던 너의 웃음소리, 그 해맑던 표정을 다시 한번
보고 싶었다.
고된 하루를 보내고 퇴근했을 때 나를 보고 '아바 아바'라고 옹알거리던 그 소리가 미친듯이 그리워졌다.
'시간여행을 하시겠습니까?'
거대한 캡슐처럼 생긴 원형의 타임머신 문을 열며 누군가 내게 묻는다면,
나는 한 치의 고민도 없이 '네'라고 답할 것만 같았다.
'다시 현재로 돌아올 수 없습니다. 그래도 하시겠습니까?'
그때의 너를 안을 수만 있다면. 아무래도 상관없다. 대답은 같다.
'원하시는 연도를 말씀하세요'
'2025년이요.'
번쩍.
섬광과 함께 감았던 눈을 서서히 뜬다.
익숙한 가구들의 배열 뒤로 피아노 아기체육관, 미니 그림팝업북, 아기쏘서를 비롯한 여러 종류의 아기 장난감들이 거실 매트 위에 놓여져있다. 주방으로는 세차게 돌아가는 분유쉐이커가 보이고 다시 그 뒤로 아기 식기들을 열탕하느라 분주한 아내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협탁 위에 놓여진 탁상달력으로 시선을 던진다.
2025년 2월.
이윽고 내 품에 안겨 쌔근쌔근 잠들어 있는 딸의 모습이 보인다.
따뜻하고. 충만하다.
이보다 더 소중한 것이 내 인생에 있었던가.
다시 돌아왔구나.
내 삶이 봄날이던때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