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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교토 맑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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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익호 Jan 08. 2017

겨울 식탁

1.

십이월의 교토에 찬바람이 분다. 그러나 바깥 풍경은 아직 겨울 차림이라기에는 이르다. 번화가에 나서면야 반짝이는 장식들이 슬슬 행인들의 눈길을 끌고 있을 시기지만 저 멀리 히가시야마로부터 가모가와 강기슭까지 차례로 이어지는 길목마다 드문 드문 붉게 물든 장식들은 크리스마스트리가 아닌 것이다. 그것은 이제야 막 절정으로 타오르기 시작한 단풍나무들이다. 작렬하던 교토의 여름이 남기고 떠난 붉은 기억들. 비현실적으로 새빨간 저 나무들이야말로 여기 교토 분지의 십이월을 대표하는 풍경일 것이다. 그들은 고상하고도 뚜렷한 자태로 우리가 아직 가을 한가운데를 지나고 있음을 일깨워주고 있다.



키요미즈의 가을

2.

교토의 가을 모양에 이끌려 북적이던 관광객들도 중순을 지나면서는 점차 줄어들고 있다. 기온 거리 한구석에 외롭게 위치한 마치야의 여관에도 비수기가 찾아온 것이다. 단 하루도 공실을 만들지 않고 돌아가던 여관 운영에 드디어 한 숨 돌릴 만한 틈이 생긴 것은 반가운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객실이 한꺼번에 세 칸씩 비는 날도 생기는 것을 보면 마냥 여유 부리고 있어도 될 상황은 아닌 듯하다. 여관에 기숙하는 식구들만으로도 꾸려나가는 것이 가능할 만큼 완전하게 한가로워지면 그때야말로 난 언제든지 일을 그만둘 각오를 해야 할 것이기에. 


식탁 위에 걸린 달력을 슬쩍 들춰본 것은 그런 불안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다행히도 일주일에 두세 번씩은 녹색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음을 확인했다. 그 뚜렷한 표시들은 여관 주인의 나에 대한 배려를 그대로 나타내고 있다. 이곳 일 외에 따로 돈벌이가 없는 내게 억지로 없는 일도 만들어 주고 있다는 인상을 지우기 힘들다.


그 마음에는 참으로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 문제는 그녀가 애써 만들어 내주는 일이란 것들의 내용이-너무나 뻔하지만-사실상 일이라 부르기에도 민망한 것들이라는 점. 내가 여관에서 할 만한 일이라곤 청소 외엔 사실상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그러나 여럿이서 매일같이 공들여 쓸고 닦는 여관에는 아무리 찾아보아도 할 일이 남아 있지 않다. 건물 구석구석에 최대한 꼼꼼히 손을 뻗어봤자 더 이상 손질할 곳을 찾기 어려운 현실이다. 거울들에는 지문 하나 묻어있지 않고, 유리창들도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잘 닦여 있다. 이층으로 통하는 나무계단은 너무 박박 문질러 닦은 탓에 벌써 손님이 두 명이나 미끄러졌다. 나무젓가락에 천을 감싸 하나하나 털어내던 격자문의 먼지조차 이젠 한 톨도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테이프 롤러를 비장하게 들고 복도를 가로지르는 긴 카펫에 붙은 머리카락들을 마지막 한 올까지 말끔하게 떼 낸들, 아직 시계는 오후 한 시를 채 가리키지 못하고 있을 때가 많다. 


한가롭게 돈을 벌 수 있다는 사실에 쾌재를 부를 수도 있겠지만 일감 없는 근무라는 게 하루 이틀만 지나도 고역으로 뒤바뀐다는 것은 누구나 잘 아는 사실일 것이다. 시트를 걷어놓은 침대에 앉아 장식장에 그야말로 장식으로 놓아둔 옛날 잡지에 한눈을 팔아보거나 복도에 걸린 고풍스러운 거울에 꾀죄죄한 차림의 남자를 비추어 보는 일에도 질려버린 지 오래되었고, 옥상에 올라 한낮의 햇볕이 따스하게 데워 놓은 철제 바닥에 드러누워 나부끼는 하얀 시트들 사이로 하늘을 바라보는 나의 작은 취미도 이 계절엔 불가능한 일이다. 


최근엔 아예 오전 중에 모든 일을 마무리 짓고 오피스에 틀어박혀 과자나 깨작이거나 리셉션 업무로 여전히 홀로 바쁜 여주인에게 한가한 수다를 늘어놓거나 혹은 가끔씩 모두가 외출하는 날이면 홀로 집을 지키며 타피와 놀아주거나 하는 것이 남은 일과의 전부가 된다. 그마저도 질릴 땐 가모가와를 한 바퀴 산책하러 나선다거나 기온 거리를 싸돌아다닌다거나 하며 시간을 때우고 돌아와서는 땅거미가 깔릴 즈음 짐을 챙겨 오사카로 돌아가곤 하는 것이다.



이렇듯 별 보람도 없는 세 시간 남짓의 근무를 위해 오사카에서 교토까지 왕복하는 나를 지켜보던 룸메이트 친구는 저쪽에서 말을 꺼내기 전에 미리 그만둔다 하고 다른 일을 알아보는 게 어떻겠냐며 늘 묻지만, 난 아직 이 일을 관두고 싶지는 않다. 일거리가 너무 없어 찜찜한 하루를 보내게 되는 것쯤 아무려면 어떤가. 난 교토로 출근하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을 정도다. 짧은 시기에 정말로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던 지난여름이지만, 그래서 도쿄까지 도망갔다 다시 돌아온 처지지만 여전히 이곳 여관 식구들은 내게 따듯하다. 그들과 함께 기온 한 구석에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은 무척 기분 좋은 일이다. 필시 길게는 간직하기 어려울 딱 한 줌만큼의 행복이지만 난 이것을 아직 손에서 놓고 싶지 않다. 


 

그 행복이란 이런 풍경을 '우리 동네'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런 소소한 전율을 동반한 즐거움이랄까. 유치할 수 있겠지만, 아직 교토에 산 날을 다 합하여 봤자 반년도 안 되었지만 말이다. 그래도 교토는, 기온 거리는 내게 있어 우리 동네다.


또 하나의 즐거움이 있다. 하루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여관 식구들이 모두 모여 먹는 따듯한 식사가 바로 그것이다. 그것들은 공을 들여 만들어내는 요리는 아니다. 특별한 날이 아닌 이상 식구들이 일을 마무리 지을 두세 시 무렵 간단히 준비하기 시작해서 후다닥 해치우는 그런 소박한 집밥들이다. 고기 야채 볶음이나 돼지 생강 구이, 만두 튀김 등이 단골 메뉴. 일본의 여느 가정집에서나 볼 수 있을 평범하고 검소한 식탁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 마유미 씨의 베이컨 카레나 새우 크림스튜 정도가 가끔 나오는 특식일까. 재료가 마땅치 않은 날엔 미야자키에서 보내준 밑반찬들을 꺼내어 미소시루만 한 솥 끓여 곁들여도 충분하다. 


소금 후추 마늘, 그리고 현관 앞 화분에 막 자라는 파슬리를 뜯어 넣은 것이 전부였던 도미 요리. 
쇼가야끼. 돼지고기 생강 구이는 일본 가정식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요리다.
가끔 도시락도 사 먹는다. 그러나 일하는 사람들에게 도시락 한 개는 부족한 양이다. 지원군으로 미야자키의 할머니가 보내주신 먹을거리들을 곁들인다. 무말랭이가 한국의 것과 닮았다.
사실 미소시루를 끓이는 것은 거의 내 몫이었다. 건더기를 무조건 많이 넣는 것이 내 방식.
인스턴트 라멘도 정성만 있으면 훌륭한 한 끼 식사다
직접 담근 우메보시는 늘 반가운 반찬
추운 계절이라 더 맛있었던 오뎅


대단한 요리들을 맛볼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애초에 계약에도 없었던 식사에 늘 끼워주시는 여관 식구들의 애정이야말로 겨울 식탁을 풍성하게 만들어주는 으뜸 재료 아닐까. 정성이 담긴 따듯한 한 끼란 다른 어떤 것보다 몸과 마음을 강하게 만들어 주는 힘이 있다. 그것은 꼭 나같이 고향을 떠난 여행자에게만 통하는 이야기는 아닐 테지만, 혼자라는 생각이 강하게 드는 때일수록 그 힘은 더 절실히 느껴지는 법이다. 식탁을 가운데로 빙 둘러앉아 같은 음식을 나눌 때 우리는 비로소 같이 일하는 사람이라는 관계를 뛰어넘어 한 식구가 된다.  


'실제 가족은 아니지만, 가족과도 닮은'


입버릇처럼 내뱉는 여주인의 상투구도 틀린 말은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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