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 독학을 시작한 지 어느덧 한 달이 훌쩍 넘었다. 쓰는 교재는 바이엘과 하농 딱 두 권.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부담을 느끼지 않을 만큼의 페이스로 이어가고 있고, 아직까지는 대부분 무리 없이 소화 가능한 수준의 곡들만 손에 대고 있다.
그러나 배움이란 게 원래 그렇듯이, 처음 몇 걸음을 겨우 뗀 현시점에서도 과제라고 부를만한 어려움은 분명 있다.
슬럼프라고 부르기엔 너무 거창하겠지만, 양손을 단박에 쳐내기 힘든 부분이 악보 위에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걸 마주칠 때마다 난 꽤 번민에 빠지곤 한다.
‘이 곡 관두고 싶다‘
새로운 곡을 배우기 시작할 때 필연적으로 마주치는 ‘강제적 멈춤 구간’이 늘어날수록, 참기 힘든 스트레스를 받는 것이다. 피아노를 오래 쳐 온 숙련자들도 종종 겪는 일이겠지만, 나 같은 초보자에게는 특히 더 그렇다.
차분히 한 손씩 시도하면 쳐낼 수 있는 음형임에도 두 손일 때 자꾸만 멈추는 이유가 뭘까. 그것은 결국 ‘피아노력’, 다시 말해 통합적인 경험치의 부족 때문이 아닐까 싶다.
처음 보는 패턴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은 긴장으로 이어져 음표를 읽는 눈을 혼란에 빠뜨리고, 손가락은 치기도 전에 벌써 굳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물론 많은 경우 두세 번쯤 반복하면 해결되기에 큰 문제가 되진 않지만.
그러나, 때론 몇 차례의 반복만으로는 도무지 해결되지 않는 복병이 등장할 때도 있다. 내 경우엔 반음계나 꾸밈음이 그 대표적인 예다. 지금까지 바이엘과 하농을 통해 순차적으로 배워 온 테크닉만으로는 도저히 해결하기 어려운 패턴이다.
이런 난관은 요즘 대세인 ‘친절한’ 교재들보다, 내가 선택한 고전적인 스타일의 교재—원전판 바이엘같은—에서 나타났을 때 더욱 어렵게 다가온다. ‘이 부분은 이렇게 치세요’ 같은 설명이 전무한 원전판 바이엘은 숙련된 교육자의 레슨을 전제로 두고 만들어진 교칙본이었음을 상기해야 한다. 불친절함을 넘어서 아예 단서조차 없는 이 책을 혼자서 배우려면 방향성을 스스로 잡아나가야 한다는 뜻이다. 현대 피아노 교육에서 바이엘 같은 고전 교재들이 점차 밀려나는 이유를 알 것만도 같다.
교재 분석이야 하자면 끝도 없겠지만, 지금은 잠시 접어두자. 어쨌든 내가 선택한 교재는 원전판 바이엘이고, 난 지금 혼자서 이 복병을 해결해야 하는 상황이니까.
이럴 때 극복을 위한 솔루션은 사실 뻔하다. 반복 연습. 그것도 질릴 만큼 많이.
’뭐가 또 안 돼요. 100번 쳐 봤어요?‘
피아노 전공자인 지인에게 조언을 구할 때면 돌아오는 농담 섞인 말. 그 말고도 많은 피아노 교육자들이 학생들에게 자주 내뱉는 말이려나.
100이라는 숫자. 그저 많이 쳐보라는 뜻의 상징적인 숫자일 뿐일 수도 있겠지만, 사실 이 말속에 정답이 있다. 언뜻 무식해 보여도, '100번 치기'는 실로 효과적인 방법이다.
그렇게 단순할까 싶기도 하지만, 연습을 하면서 곡 전체는 둘째치고 한 마디만이라도 따로 떼어 100번씩 반복하는 경우가 얼마나 있을까 생각해 보자. 작정하고 반복 연습에 들어가도 대여섯 번 정도, 정말 마음을 굳게 먹어야 열 번이 고작일까. 100이라는 숫자는 생각보다 훨씬 큰 것이다. 의욕만큼은 뒤지지 않는 나 같은 초보 연주자일지라 해도, 보통은 스무 번도 채우기 전에 나가떨어지는 게 보통이다.
사실 아무리 어려운 음형이라도 너덧번 반복하다 보면 어떻게든 손에 익기 시작하고, 대충 그쯤에서 타협하고 싶은 순간은 금방 온다. 그렇게 다음으로 넘어가고, 또다시 어려운 부분이 나오면 너덧번 손에 익히고 넘어가고... 그러나 천부적인 재능을 갖춘 소수를 제외하곤, 나 같은 취미 연주자에게 이러한 연습 방식은 진정한 의미의 실력 향상에 별다른 도움이 안 된다. 대충 손가락 위치만 기억시키는 것에 만족하고 진정한 ‘해결’을 목표로 삼지 않는 겉핥기식 연습법. 아무리 시간이 들여 연습해 봤자 실력이 제자리걸음일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생 초보 주제에 뭘 그렇게까지? 그냥 쭉쭉 새로운 곡으로 넘어가. 그 편이 더 실력 향상에 도움이 돼.’
일리 있는 말이다. 앞서 말했듯, 통합적 경험치(빅데이터) 쌓기도 역시 중요하니까.
그러나 지금 단계에서 부딪히는 작은 난관을 해결하는 버릇을 안 들이면, 나아갈수록 그것들이 쌓이고 쌓여 종국엔 도저히 넘기 힘든 큰 장애물이 되어 돌아오지 않을까.
피아노가 특별히 어려운 악기여서가 아니다. 우리 삶의 경험은 대부분 그런 식으로 돌아간다. 매일의 작은 어려움과 귀찮음을 외면하면, 그것은 언젠가 감당하기 버거운 고질로 자라나 나를 압도한다는 것을 이제는 나도 알고 있다.
자랑스레 꺼낼 이야기는 아니지만, 살면서 좋아하거나 목표로 한 것을 포기했던 기억이 꽤 많다. 사실 일이 뜻대로 잘 안 풀릴 조짐이 보이면 언제나 그래왔었다. 약간의 노력만으로는 해결이 어렵다고 느끼거나, 아예 뭐가 문제인지도 모르고 그저 버겁게 느껴질 때, 난 손쉽게 문제에서 도망치는 쪽을 택하는 편이었다.
피아노라는 게 그러한 천성을 역행하면서까지 대단한 노력을 기울일 만큼 내 삶에서 중요한 일일까. 물론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난 이 악기를 오랫동안, 할 수 있다면 평생의 취미로 삼자고 이미 정했다. 살면서 무언가를 내 인생에 포함시키려 적극적으로 노력해 본 것은 아마 처음 있는 일이 아닌가 싶다.
지금 눈앞에 닥친 작은 과제를 외면했다가는, 피아노도 얼마 못 가 흐지부지 내 앞에서 사라져 버릴 것이다. 서른을 넘어 몇 년이나 더 살아온 지금, 그렇게 놓친 것들은 이미 너무 많다. 이번에는 좀 더 신중하게 어려움과 마주해 보려 한다. ‘100번 반복하기’란, 연습 방법에 앞서 나를 붙잡아 두기 위한 가벼운 속박의 주문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관둔다고 하더라도, 100번은 시도해 보고 나서.’
또다시 나쁜 버릇이 나올 것 같은 순간마다, 스스로에게 되뇌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