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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다혜 Jan 22. 2020

일과 쉼의 균형점이 필요하다.

계속해서 나를 돌보며 일할 수 있도록

샐러드를 만든다. 채소믹스에 집에 있는 과일 몇 개를 슬라이스해서 넣고 드레싱을 뿌린다. 푸석하지만 고소한 호밀빵에 잼을 바르고 커피를 내린다. 넷플릭스에 요즘 보는 시리즈를 켜면 내가 제일 좋아하는 아침이 시작된다. 책꽂이에 꽂아 두었던 책을 꺼내 읽는다. 마음에 와닿는 문장을 기록한다. 평소 좋아하던 작가의 북토크에 가 타인의 삶과 사유에 젖어 든다. 


이런 하루를 보내는 게 언제였는지 까마득하다.


작년 11월과 12월 중순까지 쉴틈 없이 일했다. 큰 외주가 세 건, 자잘한 외주가 몇 건 있었다. 여기에 지인과 함께 1년간 함께한 공동 프로젝트의 정점인 전시 오픈이 있었다. 프리랜서 매거진 <프리낫프리 Free, not free> 2호 발행과 텀블벅 후원자를 위한 굿즈 제작 및 배포도 해야 했다. 매일매일 오늘, 이번 주, 이번 달 안에 끝내야 하는 일의 종류과 개수를 가늠하며 눈을 뜨고, 오늘 다 마치지 못한 일에 찝찝함을 느끼며 잠에 들었다. 정해진 퇴근 시간은 없었다. 일하다 체력이 고갈되거나 우울감을 느낄 때쯤, 시간으로 치면 새벽 두 시 전후에 이대로 계속 일하는 것은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하며 억지로 노트북 전원을 껐다. 그러곤 아침에 일어나 다시 기계적으로 일을 시작했다. 주말인지 평일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매일매일 해야 할 일이 산적해 있었다. 


폭풍 같은 외주와 그 외 쌓여있던 다양한 일을 처리하고 나니 불현듯 1월에 여유가 찾아왔다. 아니 강제로 여유로워졌다고 해야 할까. 다시 일할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미래의 에너지를 끌어와 11월, 12월에 모두 투하해 버렸고, 1월의 나는 에너지가 고갈된 상태로 그 어떤 생산적인 일도 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 


쉼 없이 일하다 보면 여러 위험한 증상이 나타난다. 


내 마음을 돌보지 못한다. 부정적인 감정이 자주 올라온다.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걸까?’, ‘나는 왜 이 모양인가?’, ‘오오 내 팔자여, 나는 왜 쉬지 못하나!!’ 등등 내가 판 내 무덤에 스스로 기어들어 가는 꼴이라고 해야 하나? 스트레스를 해소할 장치가 없으니 당연히 부정적으로 될 수밖에 없다. 아주 사소한 자극에도 자주 화가 치밀어 오른다. ‘화’라는 감정이 절대 나에게 이득이 될 수 없다고 알고 있어도 잘 다스려지지 않는다. 


미래를 설계할 수 없다. 내가 잘살고 있는지, 내가 목표한 것을 달성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이렇게 사는 게 내가 원했던 삶인지 진지하게 고민할 시간과 마음의 여유가 없다. 지금 당장 하는 일이 끝나면 또 어떤 일을 해서 돈을 벌어야 할지 고민하지 못하고 대책 없는 미래로 나를 이끌고 간다. 


아파도 병원에 가지 못한다. 병원에 다녀오기 위해 써야 하는 서너 시간이 너무도 크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 시간이면 내가 지금 해야 하는 일의 상당량를 할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래서 더 아파진다. 스트레스와 과로, 수면 부족으로 인한 소화불량, 속 쓰림, 기타 등등 증상이 느껴지는데, 병원에 가지 않으니 뫼비우스의 띠처럼 더 아프다. 


생활의 사소한 행위가 큰 부담으로 다가온다. 삼시 세끼를 잘 챙겨 먹는다든가, 설거지, 청소, 쓰레기 버리기 등 나라는 사람을 온전하게 잘 돌보기 위한 일이 아주 큰 부담으로 다가오고, 이 일을 해야 하는 것만으로도 다시 스트레스를 받는다. 세상에 이 글을 쓰면서 생각났다. 가장 바빴던 지난 11월에 나는 고양이가 쓰다듬어 달라고 칭얼거리는 것에도 귀찮음을 느꼈다. (진짜 심각하다. 쉼 없는 삶이란) 


바쁜 시기를 보내며 하고 싶던 일들을 2020년 1월로 모두 미뤘다. 프리랜서 모임을 더 많이 만들고 싶었고, 사회학책을 깊이 읽고 싶었다. 좋아하는 콘텐츠를 마음껏 소비하고 싶었다. 뼛속 깊이 내려가 차분하게 내 이야기를 글로 옮기고 싶었다. 이 모든 일을 바쁜 시기만 조금 지나면 하자고 스스로 미루고 다독였다. (하지만, 지난 연말 모든 에너지를 소비해버려 계획했던 일을 하지 못하고 그저 쉬고 있다.) 


나는 지금 내가 공동 진행자로 있는 팟캐스트 ‘큰일은 여자가 해야지’ 방송을 녹음하고 편집하는 일 외에는 아주 수동적이며 비생산적으로 살고 있다. 읽고 싶던 책을 읽고, 보고 싶었던 넷플릭스 드라마를 정주행한다. 사람들과 목적 없이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고 맛있는 것을 나누어 먹는다. 멍하니 고양이를 쓰다듬거나 창밖을 본다. 노트북이 없이 외출하는 일이 많아졌고, 카페에서 노트북이 아니라 책을 펼친다. 고갈된 생산 에너지를 차곡차곡 채우는 중이다. 


여유롭고 비생산적인 시간을 보내다 보니, 지난 연말의 내가 아득히 멀게 느껴졌다. 나를 돌볼 여유도 없이 매일 마감이 있는 삶을 나는 어떻게 견뎌낸 것일까. 나를 끝까지 몰아가며 일을 하거나, 모든 에너지가 소진된 상태로 얕은 숨을 쉬며 살거나. 왜 이토록 극단적이어야 할까. 쉼과 일을 병행하며 일 에너지의 샘을 채우고 비우며 균형 있게 살 수는 없을까? 


일과 삶의 균형을 지칭하는 워라밸(Work and Life Balance, 이하 워라밸)이라는 말이 있다. 워라밸이 주로 언급될 때는 취직을 하거나 직업을 선택할 때다. ‘정시에 퇴근하고 마음껏 휴가를 쓸 수 있는가?’, ‘개인의 사생활을 보호해 주는가?’ 등 직장인의 관점에서 일하는 시간과 사적인 시간의 구분이 필요함을 워라밸이라는 신조어로 응축해 표현한 것이다. 


프리랜서에게 워라밸이 있을까? 글쎄, 다른 프리랜서는 어떨지 모르겠다. 적어도 내게 워라밸은 지켜지기 힘든 가치다. 워라밸을 지키기 힘든 이유는 저마다 다르겠지만, 내 경우에는 계속해서 내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꾸준히 스스로 일을 만들어야 하고, 때로는 내 삶과 사유에 밀접한 영역에서 창작을 해야 할 때도 있다. 그래서 프리랜서의 일과 삶은 자주 교차한다. 삶이 일이며 일이 삶인 상태가 될 때가 많다. 삶과 일이 분리되지 않아서 힘든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내 삶과 사유가 밀착된 영역에서 창작해 만든 결과물로 돈을 버는 것은 꽤 만족도가 높은 일이다. 나의 오리지널리티, 오리지널리티는 내 삶과 동떨어진 것으로 보기 어렵고, 이러한 오리지널리티로 돈을 벌 때 오히려 창의적인 활동으로 느끼고 즐거움을 경험한다. 


그래도 쉼은 필요하다. 그 일이 단지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서 노동이든, 내 삶과 밀접한 사유의 영역에서 만드는 크리에이티브한 일이든 생산성을 만들어낼 때 들어가는 에너지는 비등하기 때문이다. 이 에너지를 채우는 시기, 나는 이 시기를 쉼이라고 표현한다. 프리랜서에게 필요한 것은 Work and Rest Balance, 즉 워래밸이 필요한 것 아닐까? 


워래밸을 달성하기 위해 나는 일종의 규칙이 필요하다고 느낀다. 나를 돌보고 내 주변 사람을 돌보고 에너지에 샘을 채우기 위한 규칙들. 그래서 지금 나는 내 삶의 규칙을 다시 정비하고 있다. 


여유롭게 아침을 먹는다. 정해진 시간에 출근하기 위해 급하게 아침을 맞이할 필요 없다는 점은 내가 포기할 수 없는 프리랜서의 자유 중 하나다. 그 어떤 일도 내 여유로운 아침을 방해할 수 없다고 되뇌인다. 느리고 여유롭게 꺠어나는 시간의 가치를 되새긴다. 


건강한 삶을 유지하게 해주는 작은 습관을 무시하지 않는다. 식사 후 바로 싱크대를 정리하고, 내가 일하고 쉬는 공간을 정돈하는 것. 해야 할 일을 미뤄서 생기는 스트레스를 감당하느라 에너지를 소비하기 전에 더 적은 에너지를 써서 나에게 최적화된 환경을 가꾸는 것. 


내 하루의 시간을 다시 설계한다. 24시간이 모두 일할 수 있는 시간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많아도 10시간, 적으면 8시간 정도만 일하는 시간으로 제한하기. 어쩌면, 내게 주어진 하루의 모든 시간을 잠재적인 노동의 시간으로 인지했기 때문에 그만큼의 일을 만들어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다시 하루를 설계했다. 나에게 주어진 하루는 열 시간이라고. 하루 열 시간의 노동으로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의 일은 만들지 않겠다고. 


금요일 밤과 토요일을 쉬는 날로 정한다. 일주일의 긴장을 풀고 고단함을 다독이는 시간, 금요일 밤은 나에게 그런 시간이다. 토요일은 시간에 너그러워지는 날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비생산적이어도 용서되는 날. 다시 금요일 밤과 토요일의 휴식 시간을 누리기로 한다. 


나만의 규칙을 정리하다 보니 언제까지 이 규칙을 지킬 수 있을지 모르겠다. 완벽하게 지키지 못해도 괜찮다. 그래도 규칙은 필요하다. 그래야 날카롭고 지치기만 했던 나로 침잠하지 않을 테니까. 다시 한번 다짐한다. 워래밸. 계속해서 나를 돌보며 일하기 위한 일과 쉼의 균형점을 찾아보겠다고. 




질풍노도 프리랜서로 살아남으며 겪었던 온갖 잡다한 이야기들을 편안하게 풀어냅니다.

프리랜서에 대한 꿈과 희망을 품고 계신 분들께는 프리랜서의 고단함을 프리랜서로 독립하기 두려워하는 분들께는 생각보다 괜찮은 프리랜서의 삶을 보여드릴게요. (변태 아니에요. 해치지 않아요..)

업데이트 일정은 클라이언트가 일을 많이 주지 않아서 그나마 조금 시간이 날 때..입니다. 

여러분의 공유와 댓글이 다음 편을 약속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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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by Andrik Langfield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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