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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다혜 Mar 12. 2020

사주에 비행기가 많다더니

서울과 제주를 오가는 비행기에서 써 본 단상들


네 사주에 비행기가 많대. 평생을 아주 자유롭게 살 거라더라.


20대 초반, 어느 날 내 사주를 보고 온 엄마가 비행기를 많이 탈 팔자라며 눈을 반짝였다. 나는 사주나 점 따위를 뭐하러 믿느냐고 삐죽댔지만, 내심 글로벌하게 활동하는 30대의 내 모습을 기대하기도 했다. 결론은 비행기를 많이 탈 것이라는 어느 역술가의 예지는 맞는 구석이 있었다. 글로벌까지는 아니지만, 어쩌다 보니 나는 제주와 서울을 오가는 프리랜서로 살고 있다. 2018년부터 3년째 나는 한 달에 두어 번씩 바다를 건너 제주에서 서울로, 서울에서 제주로 분주히 움직인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무언가 하고 있는 시간


어릴 때부터 나는 이동하는 시간이 가장 좋았다. 내가 이동하는 시간을 좋아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무언가 하고 있는 감각이 좋다. 학습된 무기력인지 타고난 기질인지 아무것도 안 하는 게 좋다. 그런데 평소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괜스레 죄책감이 올라온다. ‘신자유주의 시대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가장 나쁜 것 아닐까?’라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머릿속을 휘저으며 나를 계속 움직인다. 그런데 이동할 때는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물리적으로는 움직이고 있는, 어쨌든 간접적으로 무언가 하고 있는 것이니 그렇게 마음이 편할 수가 없다. 


어릴 때부터 1시간 거리의 학교에 다녔다. 그 덕에 이동하는 시간을 슬기롭게 보내는 데 도가 텄다. 덜컹거리는 버스에서도 곧잘 책을 읽고, 할 일이 없어지면 머릿속에 온갖 망상과 상상, 현실이 뒤섞이는 세계를 그리곤 했다. 스마트폰도 없던 시절이니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시간은 나에게 주어지는 정적인 단절의 시간이었다. 


종종 서울과 제주를 자주 오가는 것이 힘들지 않냐는 걱정 섞인 질문을 듣는다. 사실, 이동하는 시간을 원래 좋아하다 보니 힘들다는 느낌은 없다. 어디서든 네트워크로 연결되는 시대에 오히려 잠시간의 차단은 실로 오랜만에 차분히 글을 쓰고 책을 읽고 생각을 펼칠 기회를 준다. 스마트폰이 있기 전, 짧게는 한 시간 길게는 두어 시간을 이동하며 보낸 단절된 시간의 감각을 비행기에서 되살린다. 


비행기를 탈 때 늘 두세 권의 책과 함께한다. 한 권의 책을 읽다 잠시 지치면 다른 책을 펼칠 수 있도록. 책을 읽다 보면 으레 문장을 끄적이고 싶어지는데, 그럴 땐 노트북을 편다. 비행기에서 원고 초안을 완성한 날도 있다. 프리랜서 매거진 <프리낫프리> 창간호 편집장의 말은 제주발 서울행 비행기 기내에서 한 번에 적어 내려간 글이다. 비행기에서 노트북을 켜 글을 쓰는 모습은 꽤 그럴듯해 보인다. 사실 보이는 것보다 더 근사하고 그럴듯한 경험이다. 아무것도 방해하는 것이 없는 상태, 연결이 끊긴 상태는 오롯이 내 사유를 탐험하기에 가장 좋은 환경을 선물한다. 글 쓰는 이는 다양한 방식으로 글쓰기 위한 단절을 만든다. 누구도 침범하지 못할 작업실을 만들고 인터넷과 모바일 네트워크를 단절하는 디지털 디톡스를 하는 시간을 정해 놓는다. 서울과 제주를 오가는 비행기 안, 이륙과 착륙 근처 시간을 제외한 40여 분은 나에게 디지털 디톡스와 물리적 단절이 공존하는 시간이다. 지금 쓰는 글도 서울에서 제주로 가는 이스타 항공기 기내에서 시작됐다. 



창가 석을 좋아한다. 


편리함의 관점에서 보면 비행기에서 가장 좋은 자리는 복도 좌석이다. 뒤늦게 비행기를 탔을 때 이미 자리에 앉은 이를 일으키며 미안함과 고마움을 표현할 필요가 없고, 급한 용무가 있을 때 자리를 벗어나기 위해 눈치를 볼 필요도 없다. 내릴 때도 누군가 먼저 내리기를 기다릴 필요 없이 내가 먼저 일어나 내리는 줄에 합류하면 그만이다. 그래서 비행기 창가 좌석에 앉으면 비행기를 많이 타보지 않은 초보라는 시선이 있다. 괜히 비행기를 많이 타는 사람이면 “역시 비행기는 복도 석에 앉아야 편하지.”라고 너스레를 떨어야 할 것만 같다. 


그런데 나는 수십번을 타도 창가 석이 좋다. 사람이 가득한 비행기 안에서 그나마 사적인 공간으로 보이지 않는 벽을 쌓을 수 있을 것 같은 구석진 공간, 책을 읽고 글을 쓰다 창밖을 보며 잠시 눈을 환기하고 생각에 빠질 수 있는 자리. 비행기를 탈 때 누군가 이미 복도 석에 앉아 있다면, “죄송합니다. 들어갈게요.”라고 말해야 하고, 그런 상황을 피하기 위해 탑승 안내 방송이 나오면 누구보다 먼저 줄을 서고, 내릴 때면 복도석에 앉은 이가 일어날 때까지 하염없이 기다리는 불편함을 감수하더라도 포기할 수 없는 창가 석의 매력이다. 창가 석에 앉아야 비로소 의도된 단절의 시간을 보낼 수 있다. 


많이도 찍었다. 괜히 찍고 싶어질 때가 있다.



수만 피트 상공에서의 시간을 떠올린다. 


어떤 날은 책을 읽었고, 어떤 날은 글을 썼다. 또 어떤 날은 부족한 잠을 청했으며, 넷플릭스에서 미리 볼 영상을 다운받아 보기도 했다. 단절의 시간을 좋다고 하면서도 종종 단절되지 못한 채로 이륙 전 로드 된 웹사이트의 글을 읽거나 트위터의 타임라인을 몇 번이고 읽었다. 어떤 날은 구름 사이로 언뜻 보이는 대지를 바라보며 어디쯤의 땅일지 가늠했다. 


서울과 제주에서 나라는 사람이 시작된 배경이 다른 만큼, 지금의 내가 각 지역에서 하는 일도 다르다. 서울과 제주, 제주와 서울을 오가는 비행기 안에서 각 지역에서 일하며 주로 드러내는 내 모습을 장착한다. 우스운 이야기지만, 술을 마실 일이 많지 않은 제주에서의 나는, 술을 많이, 자주, 그렇게도 마셔댔던 서울에 가까워질수록 스멀스멀 멀어졌던 술 생각이 피어오르곤 했다. 한번은 배를 타고 서울에 올라갈 일이 있었는데, 대전을 지나며 점점 짙어진 소주 생각에 늦은 밤 서울집에 도착해 주차하자마자 집 앞 전집으로 달려가 모듬 전에 소주를 마신 적도 있다. 과학적인 이유는 모르겠지만, 내 마음이 그랬다. 비행기로 이동할 때는 정확히 어느 시점부터 술이 생각나는지 가늠하기 어렵지만, 분명 충청도를 지날 떄쯤부터 술 생각이 날 것이다. 시간을 가늠해보면 그렇다. 



이동하며 사는 삶에 익숙해진다. 


비행기를 타는 행위가 반복되며 나는 비행기 타는 과정에 일종의 습관과 형식이 만들어졌다. 처음 제주를 갈 때 나는 아주 귀여웠다. 마치 해외를 가는 것 마냥 비행시간 두 시간 반 전에 김포공항에 도착한 것이다. 게다가 여권이 필요하지 않을까 해서 가방에 여권도 챙겼다. 18세 이상의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있는 신분증으로 국내 항공기 탑승 수속이 1분 만에 끝난다는 걸 몰랐다. 사실 부끄러워서 어디에 말하지도 못했다. 국내 항공을 처음 타보는 이의 귀여운 모습이다. 귀엽다고 해주자. 지금은 30분 전에 공항에 도착한다. 웹 체크인이나 키오스크 체크인을 하고 생체 인식으로 탑승 게이트를 통과한다. 검색대만 무난히 잘 통과하면 공항에서 탑승장까지 10분이면 충분하다. 미리 화장실에 다녀오고 텀블러에 정수기 물을 채우면 비행기 탑승 준비 완료. 


국내선은 기내에 액체류를 소지해도 괜찮다는 것을 알게 됐다. 사실 최근에 알았다. 지난가을, 매거진 <딴짓>의 독자 모임 질의응답 시간에 사회를 봤는데, 센스있는 초롱씨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칵테일이 진토닉인 줄 어떻게 알고 감사 선물로 진 한 병을 건넸다. 아무 생각 없이 받아 들고 공항으로 가는데, 용량 1L의 액체라니 소지 불가능할 것이 자명했다. 급하게 공항으로 남편을 불러 진 한 병을 건넸다. (남편은 서울에 산다.) 그 일이 있고 한 달 후에야 국내선은 기내 액체반입이 가능하다는 걸 알았다. 생각해보니 나는 늘 텀블러에 비상시 마실 물을 담아서 가방에 넣고 다니는데, 늘 무사히 통과했다. 그런데 그걸 몰랐다니. 


제주집에서 서울집 문에서 문까지 세 시간 컷이다. 제주와 서울 모두 공항에서 차로 15분 거리에 살아서 가능한 시나리오다. 마치 출근하듯 서울에 오고, 퇴근하듯 제주에 갈 때가 많다. 세 시간의 이동 시간을 고려하면 일과의 중간에 이동하면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기 어려웠다. 그리고 제주에서 서울을 갈 때는 이른 아침, 서울에서 제주로 갈 때는 늦은 저녁이 가장 티켓이 저렴하다. 그래서 제주에서 서울로 갈 때는 아침 일찍 비행기를 타고 김포에 도착해 집 근처 카페나 그날 일정이 있는 지역으로 가 바로 일을 시작했다. 서울에서 제주로 갈 때는 아침 일찍 나와 공항 근처에서 일하다 퇴근하듯 비행기를 타고 제주로 갔다. 가끔은 피곤하다. 더 싼 비행기 티켓을 구하느라 아침 7시 비행기를 타거나 저녁 8시 - 9시 비행기를 탈 때도 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기 피곤하고 집에 일찍 가지 못해 피곤하다. 


비행기를 자주 타니 종종 예매를 잘못해 웃지 못할 에피소드를 만들기도 한다. 한번은 아침 7시 40분 비행기를 타야 해서 평소보다 두 시간 일찍 일어나 공항으로 갔다. 비행기 탑승 게이트에 사람이 적어 의아했는데, 탑승 시간이 되어도 사람이 나타나질 않았다. 알고 보니 나는 오후 7시 40분 비행기를 예매했다. 오전 회의는 화상으로 진행하고 오후 7시 40분이 될 때까지 공항 카페에서 일할 수밖에 없었다. 탑승지가 다른 티켓을 예매한 적도 있다. 서울발 제주행 비행기를 예매했어야 했는데, 제주발 서울행 비행기를 예매했다. 탑승장에 들어가기 위해 생체인식 게이트에 비행기 티켓 바코드를 찍으니 ‘탑승 공항이 다릅니다'라는 안내지가 출력됐다. 그때부터 비행기 예매를 하고 나서 시간과 경로를 크로스체크 더블 체크한다. 


언제까지 오가는 삶을 계속할 수 있을까?


얼마 전 제주집을 정리하고 서울에 올라왔다. 자세히 설명하기 어려운 여러 상황이 서서히 제주의 삶을 정리하고 다음으로 나아가라고 말하고 있었다. 사는 곳은 다시 서울로 옮겼지만, 일이 있어 제주와 서울을 오가는 삶은 당분간 계속될 예정이다. 사실은 가능하다면 제주와 연결된 끈을 계속 붙잡은 채로 일하고 싶다. 한 달에 두어 번씩 비행기를 타고, 서울과 제주에서의 일상의 다름을 동시에 느끼며 살고 싶다. 엄마가 만난 역술가의 말이 맞다면, 사주에 비행기가 많은 사람이니 당분간은 이렇게 제주와 서울을 오가는 비행기를 계속 타게 되지 않을까? 



질풍노도 프리랜서로 살아남으며 겪었던 온갖 잡다한 이야기들을 편안하게 풀어냅니다. 댓글로 소재를 받아요. 궁금한 이야기가 있다면 자유롭게 댓글을 남겨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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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일은 여자가 해야지'는 일과 여성, 프리랜서의 이야기를 다루는 팟캐스트입니다. 매거진 <딴짓> 박초롱과 매거진 <프리낫프리 Free, not free> 이다혜가 공동 진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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