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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다혜 Mar 26. 2020

글을 올리지 않으면 한라산에 가야합니다.

프리랜서의 셀프 마감이란.. 


이 글은 지하철 9호선 급행열차에서 쓴 글이다. 매주 목요일 브런치에 글을 올리지 않으면 꼼짝없이 한라산 정상에 올라야 한다. 프리랜서 몇 명이 같이 하는 느슨하게 브런치에 글을 올리는 모임에서 내가 직접 나에게 선물한 벌칙이다. 망할. 한라산 정상 등반이라는 벌칙은 너무 강력해서 일말의 꼼수도 허락하지 않는다. 무엇이 되었든 써서 올려야 한다. ‘이참에 자주 한라산 정상에 오르면 건강도 챙기고 좋겠네.’ 라고 생각하며 은근슬쩍 글을 놓아버리고 싶을 때도 있지만, 나는 안다. 내 지금의 근력과 체력으로 한라산 허리도 가당찮다. 글을 올리지 못하면 몇 달간 체력 훈련부터 해야 한다. 한라산 정상 등반을 위한 장비 구매까지 돈과 시간을 쏟아야 한다. 어떻게든 글을 올려야 한다. 



콘텐츠 분야 프리랜서는 셀프 마감에 익숙하다. 창작자라는 아이덴티티를 지키기 위해, 창작물을 통해 혹시 들어올 외주를 위해 꾸준히 지치지 않고 셀프 마감을 만들어 무엇이라도 결과물을 온라인에 올린다. 혼자는 어려울 때가 많다. 내가 나를 감시한다는 것만큼 어려운 게 또 있을까? 나는 세상에서 가장 너그러운 상사다. 

오늘 안 하면 뭐 어때~ 내일 하지 뭐.
잠시 폭신한 침대에 누워봐.
그거 봤니? 넷플릭스에 킹덤 시즌2 올라왔단다.
마감은 내일 하면 돼~


어찌나 너그러운지. 이쯤 되면 내 상사가 아니라 작정하고 망하게 하려는 경쟁사 대표 같다. 


그래서 누군가와 마감을 약속하고 벌칙을 정한다. 그리고 누가 돈 주는 것도 아닌데 열심히 글을 쓴다. 벌금을 내는 약속이라면, 돈을 오히려 내면서 글을 쓴다. 그렇게 돈 되지 않는 셀프 마감을 치열하게 한다. 




대체로 이런 글쓰기 모임에서는 벌금을 낸다. 몇 년 전 글쓰기 모임을 할 때는 보증금 10만 원을 미리 걷고, 마감을 한 번 어길 때마다 보증금을 까먹는 식으로 벌금을 냈다. 모임이 끝나면 적립된 벌금 외에 다시 보증금을 돌려줬다. 벌금이 만 원이었나..? 사실 한 달 생활비 정도의 벌금이 아니면 게으름을 돈으로 산다. 이번 주는 정말 글이 안 써지는 군! 만 원을 기부해야지! 뭐 이런 식이다. 나태함과 게으름을 열심히 돈으로 산다. 



그래서 이번 모임은 돈을 내는 것으로 벌칙을 정하기 싫었다. 나는 슬며시 제안했다. 벌칙을 각자 정해봅시다. 내가 절대 절대 하고 싶지 않은 그 무엇으로 벌칙을 정하면 정말 열심히 글을 쓰지 않을까요? 나는 먼저 ‘한라산 정상에서 인증샷’이라는 벌칙을 내놨다. 그러자 제주에 사는 또 다른 프리랜서도 ‘한라산 정상에서 인증샷’ 벌칙을 내놓았다. 서울에 사는 프리랜서는 서울에서 어려운 산에 오르겠다고 말했다. 그리하여 이 모임에 라이팅 오어 마운틴(Writing or Mountain), 라마단이라는 이름이 생겼다. 



제주에 사는 또 다른 지인은 벌칙을 한라산 정상 등반이 아닌 다른 것으로 정했다. 밥을 먹기 위해 만났을 때 넌지시 물었다. “한라산 벌칙이 강력한데, 왜 다른 벌칙을 정했어요?” 그가 말했다. “저는 사실.. 등산 좋아해요.” 


아.. 누군가에겐 벌칙이 아닌 것이 벌칙이 된다는 것. 이토록 사람은 다양하다. 



1월 말쯤 시작해 벌써 8개 글을 올렸다. 8주를 꼬박, 한 번도 쉬지 않고 브런치에 ‘프리랜서’와 관련된 다양한 글을 썼다. 푸념 같은 글도 있고, 자기계발서 같은 글도 있다. 어쨌든 프리랜서로 살아가며 보고 듣고 느끼는 그 어떤 것을 계속 글로 남긴다. 강력한 벌칙 덕에 나는 이 모임이 끝날 때까지 매주 글을 써야 한다. 글감이 떠오르지 않을 때, 내 손가락이 자꾸 똥을 뱉어낼 때는 여간 고통스러운 게 아니다. 그래도 기대된다. 2021년 1월 말이면 적어도 50여 개의 글이 브런치에 남을 테니까. 



고민 할 때가 있다. 


이 정도 글을 공개하느니 차라리 내가 한라산 정상에 가고 말겠어! 


틀렸다. 차라리 부족한 글을 내보낸다. 한라산 정상 등반이란 벌칙은 이토록 무섭다. 1월 말부터 올린 8개의 글은 사실 초안 수준의 글이다. 최소한 ‘글’이라고 소개할 만큼 완성도를 높이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매주 올리는 글에 그런 시간이 있을리가 없다. (외주해야지요. 돈 벌어야지요.) 월요일에 글감을 정하고 화요일에 초안을 쓰고 수요일이나 목요일에 겨우 1차 퇴고를 거쳐 올린다. 오늘처럼 당일에 닥쳐서 한 시간 만에 써서 올릴 때도 있다. 


아아 고통스럽다. 낙서장을 공개하는 기분이다. 나름 글쓰는 일을 한다는 사람이 이따위 글을 읽으랍시고 내놓아도 되는 것인가? 괜찮아 어차피 구독자 몇 명 안 돼. 브런치 글은 어차피 글감 정리를 위한 초안이라고 밑밥을 깔자! 


온갖 생각을 하며 오늘도 올린다. 저 고통을 모두 합쳐도 한라산 정상 등반을 하는 것보다 더 낫다. 



생각해보면 완벽이란 게 있을 리가 없다. 나만 아는 디테일에 집착할 필요도 없다. 세상은 생각보다 너그럽다. 그 어떤 변태가 내 글을 읽으며, 조목조목 못생긴 점을 집어낼까? 사람들은 생각보다 나에게 관심이 없다. 내가 무슨 셀럽도 아니고 내 문장과 단어를 조목조목 뜯어가며 비판하는 사람이 어디 있느냔 말이다. 설사 있더라고 뭐 어때. 돈 받고 쓰는 글도 아닌데. 내 마음대로 써서 올리면 되는 셀프 마감 글쓰기인데. 



일주일이 빨리도 간다. 목요일이 돌아오면 간신히 글 하나를 올려놓고 한숨 돌린다. 이번 주도 한라산행을 면하였다며 가슴을 쓸어내린다. 한참 가슴을 쓸어내리다 보면 어느새 수요일 밤이다. 젠장. 내일 또 글을 올려야 한라산 정상에 등반하는 거대 프로젝트를 피할 수 있겠군. 



어떻게든 쓰게 된다. 좋든 부족하든 마침표를 찍는다. 프리랜서는 아무것도 없을 때도 무언가 계속한다. 움직이는 만큼 기회가 오고, 기회가 와야 돈을 번다. 부족한 무엇이라도 꾸준히 하는 것만으로 빛이 난다. 매일 세 끼 밥상을 찍어 올리는 블로거가 있었다. 글도 없다. 사진이 예쁜 것도 아니다. 식단이 특별하지도 않았다. 그냥 매일 먹는 평범한 밥을 매일 찍어 올렸다. 거의 천 일 동안. 그의 블로그는 어느새 유명해졌다. 매일 밥상을 올리는 블로거가 있다며 너도나도 그의 삼시 세끼를 보러 블로그에 방문했다. 그가 이후에 더 유명해졌는지, 그 유명세로 돈을 벌었는지 나는 모른다. 그래도 가끔 생각난다. 


의미 없어 보이는 것도 매일 켜켜이 쌓다 보면 누군가 알아준다. 거기서 시작일 것이다. 


수적천석(水滴穿石), 물방울이 돌을 뚫는다는 이 사자성어가 무의미해 보인 때가 있다. 인생은 역시 한방이지. 어느 세월에 물방울로 돌을 뚫는단 말인가. 그땐 몰랐다. 돌을 뚫을만한 물이 나에겐 주어지지 않았다. 설사 주어져도 돌을 산산조각 낼 뿐 예쁘게 뚫을 순 없다. 


한라산을 가지 않기 위해 뭐라도 쓰자고 떠오르는 대로 글을 쓰다가 갑자기 인생의 진리를 깨닫고 난리다. 아무튼 오늘도 썼다. 이번 주도 나는 썼다. 다음 주도 나는 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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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일은 여자가 해야지'는 일과 여성, 프리랜서의 이야기를 다루는 팟캐스트입니다. 매거진 <딴짓> 박초롱과 매거진 <프리낫프리 Free, not free> 이다혜가 공동 진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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