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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다혜 Apr 02. 2020

주식도 분산투자 하는데 커리어라고 왜 안돼?

여러 일을 병행하며 정체성에 혼란이 오는 프리랜서


하나의 일, 하나의 직업으로만 먹고 사는 프리랜서는 몇이나 될까? 


정규직보다 계약의 종료가 쉬운, 자유로운 계약 형태로 노동하는 프리랜서는 고정된 일감을 얻기 어렵다. 2018년 서울시에서 발표한 프리랜서 노동 실태 보고서에 따르면, 조사에 참여한 프리랜서 중 절반 이상인 54.6%가 정기적으로 지속되는 일감이 없다고 답했다. 코로나19가 확산되며 여행 및 관광, 행사 업계부터 문화예술 분야 및 강의를 업으로 하는 프리랜서까지 다양한 분야의 프리랜서들이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고 생활고를 겪고 있다. 국가적 재난 상황이 아니어도 프리랜서는 지속해서 생계의 위협을 느낀다. 프리랜서가 받는 외주는 3개월 이내 단기간 프로젝트가 많다. 사실 3개월도 긴 편이다. 콘텐츠 제작이나 창작계통 프리랜서는 그림 한 건, 원고 한 건 등 일회성 외주가 대부분이다. 운이 좋게 장기 계약을 하는 경우에도 1년이 넘기 어렵다. 대부분 6개월이 최대다. 


그래서 프리랜서는 여러 일을 병행한다. 하나의 일로 수익을 지속해서 내기 어렵기 때문에 N개의 일을 돌려가며 생계를 유지할만한 수준의 월급을 스스로 만들어낸다. 형태는 다양하다. 하나의 직업으로 여러 프로젝트를 돌리거나 아예 여러 직업을 병행하기도 한다. 개인적으로 만난 프리랜서들은 여러 직업을 병행하는 경우가 많았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콘텐츠 마케팅 실무와 온라인 채널 마케팅 컨설팅, 에디터, 문화기획, 강의 등 다양한 일로 먹고산다. 하나의 영역에서 파생된 새로운 형태의 일도 있다. 콘텐츠 마케팅과 문화기획을 한 경험이 만나며, 창작자의 프로젝트를 크라우드 펀딩으로 실현하도록 도와주는 크라우드 펀딩 컨설팅 일도 있다. 그렇다 보니 나는 한 마디로 내 일을 정의하기 어렵다. 



프리랜서 00의 00에 어떤 단어를 넣어야 할지 고민했던 시기가 있다. 


몇 년 전, 어떤 모임에서 자기소개를 할 일이 있었다. 내가 ‘프리랜서’라고 소개하자 그 자리에 있던 한 사람이 무슨 프리랜서냐고 물었다. 나는 그냥 이런저런 일을 하는 프리랜서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는 다시 ‘메인으로 하는 일’이 무어이냐고 추궁하듯 물었다. 아니 무슨 형사인 줄. 순간 기분이 상해 그냥 콘텐츠 만드는 프리랜서라고 말하고 눈을 피했다. 대화를 계속하기 불편했기 때문이다. 


누군가 만나면 관등 성명을 대듯 어떤 회사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공유한다. 회사의 이름과 분야, 하는 일의 종류 즉, 내 명함 옆에 적힌 부서와 직급 혹은 직책으로 정체성을 부여한다. 그렇다 보니 명확하게 한 단어로 정의할 수 없는, 다양한 일을 하는 사람은 때로 정체성에 혼란이 온다. 나는 에디터인가 기획자인가 마케터인가? 몇 개의 직업 정체성을 갖고 살다 보니 그 어떤 분야에서도 전문가라고 부르기 어려운 상태가 되기도 한다. 자칫하면 직업 자존감이 낮아지고 늘 대체 가능한 인력으로 사는 것 같아 불안감이 치솟는다. (사실 누구나 대체 가능하다. 대통령도 대체 가능한데 나라고 뭐 다를까.) 


같이 팟캐스트 ‘큰일은 여자가 해야지’를 진행하는 만춘씨는 무슨 일을 하느냐는 질문에 늘 구구절절 길게 설명하다 결국 ‘글 밥 먹고 사는 사람’이라고 소개문을 정리했다. 그는 매거진 <프리낫프리>에 ‘직업이 뭐냐는 질문에 대한 고리타분함’이라는 칼럼으로 (단어의 본 의미와 다르게) 정체되어 있지 않은 다양한 직업 정체성을 소개했다. 그는 글에서 좋아하는 일, 생계를 위한 일, 그냥 하고 싶은 수많은 일을 하는 프리랜서에게 하나의 정체성을 부여하는 것은 구시대적이라고 말했다. 한 사람의 삶이 다면적인 만큼 직업 또한 다양할 것이다. 하나의 직업 범주에 포함된다고 하더라도 일의 종류는 역시 너무도 다양하고 가변적이라 이제 하나의 직업 정체성으로 머무르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누구든 하나의 업이나 일로 직업 정체성을 규정하기 어려울 것이다. 



직업이 매일 생기고 사라진다. 


4차산업 혁명이라고 부르는, 기술집약적 사회가 다가올수록 직업은 더욱 많이 사라질 것이며, 동시에 상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직업이 탄생할 것이다. 내가 처음 일을 시작할 때 내 직업을 명확하게 정의할 수 있는 단어가 없었다. 온라인 매체 중심으로 콘텐츠를 만들어 기업이나 브랜드를 홍보하는 직군은 언론홍보와 오프라인 프로모션을 중심으로 했던 전통적인 홍보업, 시장의 변화를 읽고 해당 시장에서 회사, 브랜드 시장 파이를 확장하기 위한 포괄적 활동을 하는 마케팅업과는 다소 다른 업의 특성을 지녔다. 내가 하는 일은 2010년대 초반 온라인이라는 매체가 홍보와 마케팅에서 중요한 채널로 떠오르자 생겨난 홍보 혹은 마케팅에 새롭게 파생된 일이다. 그래서 어딘가에선 온라인 마케터로 불렸고, 어딘가에서는 디지털PR인으로 불렸다. 일을 시작하고 몇 년이 지나 ‘콘텐츠 마케터’라는 언어가 생기며 비로소 나는 ‘콘텐츠 마케터’라고 내 업을 설명할 수 있었다. 


일러스트레이터 이다 작가님을 게스트로 팟캐스트 ‘큰일은 여자가 해야지’를 녹음했다. 20년 가까이 일러스트레이터로 일한 그에게 2000년대와 2010년대 그리고 지금의 일러스트레이터 시장은 어떻게 변했는지 물었다. “2000년대 중반까지도 일러스트레이터의 주 클라이언트는 잡지사였어요. 지금은 다 폐간됐죠. 잡지로만 먹고 살 수 없어요.” 하나의 직업으로 일한 사람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 잡지사에서 출판사, 온라인 매체로 콘텐츠가 팔릴 자리를 찾고, 그것에 맞게 기술을 다듬는다. 


하나의 일, 하나의 업으로 먹고살 수 있다는 것은 이제 신화에 가깝다. 매일 사양 산업과 직업이 생기는 마당에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데 하나의 직업, 하나의 일에 인생을 바치는 것은 마치 전 재산을 하나의 주식에 투자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내가 일하는 분야와 일이 성장주일지, 가치주일지 상장폐지 직전인 주식일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성공도 망하는 것도 한 방에 결정 나도록 내 인생을 투자하면 안 된다는 말이다. 


특히, 단기 계약 중심으로 일하는 프리랜서는 더더욱 여러 일을 병행하지 않으면 생존하기 어렵다. 지난해 프리랜서 모임을 하며 만난 많은 프리랜서는 대체로 몇 개의 일을 병행하고 있었다. 같은 분야가 아닌 경우도 많았다. 음악을 하는 한 프리랜서는 낮에는 외식 브랜드에서 요리를 하고 밤에는 음악을 만든다. 한 일러스트레이터는 오전에는 사무직으로 일하고 오후에는 일러스트레이터로 그림을 그린다. <저 청소일 하는데요?>를 쓴 김예지 작가도 청소일과 창작 일을 병행한다. 그림을 그리는 지인 A는 개인 작업과 전시 기획을 하며 방과 후 교사로 일한다. 내 글에 자주 등장하는 지인은 카페를 하며 그래픽 디자이너로 일하고 웹툰을 그린다. 



여러 일을 병행하는 이유가 단지 더 많은 돈을 안정적으로 벌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때로 하고 싶은 일을 계속할 경제력과 동력을 얻기 위해 생계를 위한 일을 병행한다. 창작 직군은 그런 경우가 대부분이다. 심리상담소 에브리마인드를 운영하며 그림일기를 그리고 꾸준히 책을 내는 서늘한 여름밤 작가는 ‘큰일은 여자가 해야지’에 나와 이런 명언을 남겼다. “내가 나의 메디치 가문이에요. 서밤이 하고 싶은 것 다 해.” 그는 돈을 벌어다 주는 사업을 기반으로 꾸준히 창작하는 여건을 조성하고, 창작 일을 통해 사업에서 오는 건조한 마음에 생기를 더한다고 말한다. 프리낫프리 창간호에서 인터뷰한 김민섭 작가도 삶과 노동과 글쓰기 세 가지의 합치를 바탕으로 꾸준히 일하며 창작할 동력을 얻는다고 말했다. 그는 대리기사와 작가로 일하며 책을 냈다. 지금은 기획과 글쓰기를 병행하고 있다. 


주식 투자는 잘 모르는 사람도 아는 주식의 기본은 분산투자다. 나는 프리랜서가 일과 업을 바라보는 시선도 분산투자 같은 시선이 필요하다고 본다. 요즘 시대에는 더더욱. 프리랜서는 내가 가진 능력과 일한 분야와 직업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꾸준히 새로운 일과 분야에 도전하고 일할 수 있는 업과 분야의 파이를 확장해야 한다. 생존을 위해서, 그리고 자아실현을 위해서. 


이렇게 일하다 보면 필연적으로 직업 정체성에 혼란이 온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프리랜서’라는 업의 형태 외에 그 어떤 것도 하나의 답으로 떨어지지 않는 상태가 온다. 그럴 때 프리랜서가 취해야 할 태도는 현대 사회에서는 당연히 그렇다는 점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직장인도 이직하며 혹은 회사 내에서 자의든 타의든 팀을 이동하며 새로운 분야의 일을 하게 될 때가 많다. 늘 직장인으로 머무르는 것도 아니다. 회사에서 개발자로 일하다 어느 날 퇴사를 해 바리스타가 될 수도 있다. 7년 전, 나와 같은 회사에서 같은 일을 했던 사람들은 이제 모두 다른 일을 한다. 어떤 이는 브랜드 홍보 일을 하고 어떤 이는 데이터를 바탕으로 광고 전략을 수립하는 일을 한다. 같은 업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안에서도 파생된 수많은 갈래에서 계속 변화하는 시대에 대응하며 일에 적응한다. 


생계를 위한 일, 자아실현을 한 일을 병행하며 생계를 위한 일을 할 때도 계속해서 변화하는 사회에 적응할 수 있는 태도를 갖추는 것. 그게 프리랜서로 계속 일하는 기본 일수도 있겠다. 그러면서 계속 질문하는 거지. 

주식도 분산투자 하는데, 커리어는 왜 안돼? 


팟캐스트 '큰일은 여자가 해야지' 33화, 경계에 선 프리랜서의 정체성 찾기편에서 더욱 생생한 프리랜서의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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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팟캐스트 '큰일은 여자가 해야지' 방송 듣기 

'큰일은 여자가 해야지'는 일과 여성, 프리랜서의 이야기를 다루는 팟캐스트입니다. 매거진 <딴짓> 박초롱과 매거진 <프리낫프리 Free, not free> 이다혜가 공동 진행합니다.

▶ 팟캐스트 '큰일은 여자가 해야지' 유튜브 


Photo by Jean-Philippe Delberghe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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