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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다혜 Apr 09. 2020

산만한 프리랜서의 재택근무 적응기

집에서 일하면 옥편도 재밌어지고 막 그래.. 

“오늘도 집 밖에 나가야 하다니! 귀찮군..” 

“씻기 귀찮기 때문입니까!” 

“아니. 난 집에서 일할 때도 샤워하는데..?”


오늘 아침 매일 먹고사니즘의 기쁨과 슬픔을 나누는 단톡방에서 나눈 대화다. 재택근무의 장점은 씻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라고 생각할 테지만, 사실 내가 재택근무를 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출근 의식은 씻는 행위다. 찌든 때를 씻어 내며 한없이 늘어지고 싶은 마음을 씻어낸다. 머리를 감으며 둔한 정신을 깨운다. 온몸의 물기를 닦아내고 적당히 편안하며 깨끗한 외출복을 챙겨 입으면 상쾌하게 일할 준비가 끝난다. 




예능 프로그램 ‘알쓸신잡’에서 정재승 교수가 했던 말이 생각난다.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휴식공간으로 인지된 공간에서 공부나 일을 하는 것은 공간에 대한 뇌의 인식 자체를 전환해야 하므로 쉽지 않다는 내용이었다. 생각해보면 어릴 때 공부할 때도 튼튼한 책상이 있는 방을 두고 굳이 돈을 써 가며 독서실에 갔다. 집에서 책을 들춰보려고 하면 집 안에 있는 모든 것이 흥미로웠다. 책장 가장 구석지고 어두운 곳에 꽂힌 오래된 책이 갑자기 눈에 들어오고 관심도 없던 어항 속 유영하는 금붕어의 비늘 하나하나가 모두 신기했다. 심지어 옥편까지 재밌게 느껴졌다. 멍하니 책장을 바라보다가 왜 책이 이렇게 뒤죽박죽 엉망으로 꽂혀있는지 궁금해지고 이내 책을 카테고리별로 구분해 새로 책장에 꽂아 넣었다. 온갖 비생산적이고 쓸데없는 호기심에 에너지를 쏟다 보면 이내 지쳐 달콤하게 폭신한 침대로 기어 올라가 잠에 들며 ‘역시 난 틀렸어.’ 따위의 생각을 했다. 


프리랜서로 일할 때도 마찬가지다. 집에서 일하려면 어찌나 집 안이 흥미로운지. 주방 수납장의 그릇 정리 패턴이 갑자기 마음에 안 들어 새로운 방식으로 정리하거나 쓸데없이 침대보를 바꾼다. 평소라면 눈길을 주지 않을법한 온갖 것에 관심을 두며 일과 상관없는 모든 일에 에너지를 쏟기 시작한다. 요즘은 하나 더 추가됐다. 넷플릭스, 왓챠플레이, 유튜브. ‘딱 10분만 쉬어야지’라는 생각으로 넷플릭스, 왓챠플레이, 유튜브를 켜면 그날은 이미 셀프 연차다. (프리랜서는 연차가 따로 없지만, 평일에 쉴 때면 괜히 머쓱해 셀프 연차라고 부른다.) 앱을 끄지 않게 만들기 위해 영악한 콘텐츠 플랫폼은 어찌나 찰떡같이 마음에 드는 영상을 들이미는지, 이쯤 되면 사람이 아니라 넷플릭스, 왓챠플레이, 유튜브가 영혼의 동반자다. 


재택근무가 이렇게 어렵다. 시시각각 산만할 이유를 주는 환경에서 일에만 전념하기 위해서는 큰 의지가 필요하다. 그래서 나는 집에서 일하는 의지를 다잡는 대신 주로 돈으로 의지를 샀다. 카페와 코워킹스페이스에 갔다. 커피값과 공간값을 써가며 사적이며 공적인 공간에서 행동을 통제하며 일하게 만들었다. 한 달에 적게는 십만 원, 많게는 이십만 원 가까이를 커피값과 공간값으로 썼다. 수입이 괜찮을 땐 ‘그 정도 돈 쓰고 말지.’ 생각할 수 있지만, 수입이 변변찮을 때는 이 돈이 그렇게 아깝다. 밖에서 일하면 공간값만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밥값도 들어간다. 견물생심이라고 공간을 오가는 길에 괜히 드러그스토어나 마트에 들러 소소한 소비를 하는 것은 덤이다. 그래서 재택근무에 적응해보기로 했다. 




이제부터 재택근무를 하기로 했다고 해서 바로 집에서 일할 의지가 샘솟을 리 없다. 재택근무자로 일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 


일하게 만드는 첫 번째 장치는 출근 의식이다. 예전에 한 재택근무자는 마치 출근을 하듯 집에서 나와 동네 한 바퀴를 돌고 다시 집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그만의 출근 의식이다. 동네를 돌며 쉬는 인간에서 일하는 인간으로 전환하는 과정이다. 내 출근 의식은 글 서두에서 쓴 것처럼 씻는 것이다. 개운하게 씻고 깔끔한 옷을 입는 것이 재택근무자로 출근하는 행위다. 


두 번째 장치는 마음에 드는 작업 환경을 만드는 것이다. 내가 편하게 느끼는 작업 조건을 그대로 집에 만든다. 나는 적당한 크기의 나무 테이블, 편안한 의자, 예쁜 조명,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 이 네 가지 요소가 중요했다. 사실 지금 사는 집에 처음 살기 시작할 때 방 하나를 서재로 꾸미겠다며 테이블과 책상을 두었다. 그런데 살다 보니 가장 사용 빈도가 낮은 이 방에 점점 짐이 쌓였다. 서재가 아니라 창고였다. 한쪽에는 책장에 책이 가득하고 다른 한쪽에는 라면 박스와 쌀 포대가, 또 다른 한쪽에는 캠핑용품과 골프 클럽 세트(남편 것이다. 쓰지도 않으면서 버리지도 않는 애물단지)가 있었다. 거실에는 좌식 방석과 쿠션, 낮은 테이블을 두었기 때문에 그곳에서 일하면 허리가 아작날 게 분명했다. 그래서 재택근무를 결정하고 당장 서재 되살리기에 들어갔다. 창밖으로 하늘이 보이는 것이 나에게는 매우 중요한 작업 환경이므로 책상을 창가에 붙이고, 책과 일에 관련한 것을 제외한 모든 것을 서재에서 치웠다. 예쁜 조명도 설치했다. 뱅크 스탠드, 혼자 살 때부터 사고 싶던 뱅크 스탠드를 놓았다. 


아아를 개시한 날, 신나서 기념샷을 찍었다. 사실 그 불을 켜고 끄는 체인이 뱅크 스탠드 조명의 핵심인데 사고 나니 체인이 없는 제품이었다.. 


세 번째 장치는 마음에 드는 작업 환경을 유지하는 것이다. 작업환경을 만드는 것보다 작업 환경을 유지하는 게 더 중요하다. 사실 집에서 일할 때 제일 나를 괴롭히는 것은 집안일이다. 학창 시절 공부하기 전 공들여 방 청소를 하는 게 괜히 그러는 게 아니다. 공부할 마음이 드는 깔끔한 환경을 만들어야 비로소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도 마찬가지다. 집에 집안일이 산적해 있으면 일에 집중하기 어렵다. 그래서 바로바로 집안일을 하는 습관을 만들었다. 특히 설거짓거리를 싱크대에 방치하지 않기로 했다. 귀찮으면 하루가 지나도록 개수대에 그릇이 쌓여있던 과거는 안녕. 식사 후 바로 설거지 원칙을 세웠다. 이 외에도 쓰레기 바로 버리기. 어질러진 잡동사니 바로 정리하기 등 습관적으로 작업을 할 때 거슬리는 것이 없도록 자주 가벼운 집안일을 처리했다. 이렇게 해도 집안일이란 늘 산적해 있는 것이므로, 집안일 리스트를 만들었다. 집안일의 빈도와 처리 하는 요일을 정하고 그 요일에만 해당 집안일을 하기로 정해둔 것이다. 오늘 빨래를 하는 날이 아니면 빨래가 쌓여 있어도 신경 쓰지 않으려 노력한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 눕.지.않.는.다. 

눕는 순간 끝이다. 셀프 연차다. 달콤한 이불의 유혹에 넘어가면 일하는 인간으로 전환은 영영 안녕이다. 그래서 절대로 누우면 안 된다. 쉴 때도 누우면 안 된다. 차라리 서서 방안을 서성일지언정 절대 누우면 안.된.다. 




쓰다 보니 이렇게까지 애써서 재택근무를 할 일인가 싶다. 사실 이 모든 것을 지킨다고 하더라도 재택근무를 계속하기는 쉽지 않다. 인간은 유혹에 약하고, 그 유혹에 약한 인간 중 나는 더욱 더 유혹에 약한 부류의 인간이므로. 그런데 나는 올해 처음으로 한 달간 대체로 집에서 잘 적응하며 일하고 있다. 프리랜서 7년 차, 이토록 꾸준히 게으르지 않게 재택근무를 한 적이 있던가. 곰곰이 생각해봤다. 나는 어떻게 재택근무를 실현하고 있는가. 


내가 재택근무를 할 수 있게 해준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에스프레소 머신과 에어프라이어다. 작년 말 에스프레소 머신이 생겼다. 얼마 전에는 에어프라이어를 샀다. 장비가 생기며 커피를 내리고 마음에 드는 식단으로 끼니를 챙겨 먹는 취미가 생겼다. 오 이것은 절대 밖에서 일할 때 누릴 수 없는 풍요다. 식사의 풍요로움에 비해 드는 돈은 훨씬 적었다. 밖에서 일하며 늘 대충 끼니를 때웠다. 카페에서 파는 베이글, 김밥헤븐의 온갖 김밥들이 내 주식이었다. 바쁠 때는 딱딱한 단백질 바를 오물거리며 턱관절의 움직임을 생생하게 느끼기도 했다. 정돈된 공간에서 나에게 맞는 식단을 저렴한 가격에 챙겨 먹을 수 있는 기쁨이 필요했다. 재택근무가 그걸 가능하게 했다. 


글을 쓰다 보니 재택근무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결국 외부에서 일할 때보다 더 쾌적하고 경제적으로 이득인 어떤 요소가 필요했던 게 아닌가 싶다. 반대로 재택근무를 하지 못했던 때를 떠올리면, 나에게 맞는 공간과 환경을 갖추지 못해 집이란 곳이 작업하기에 딱히 큰 장점이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토록 밖으로 돌아다녔던 게 아닌가. 그런데 쓰다 보니 결국 외부 환경보다 더 좋은 내부 환경을 만들어 준 것이 에스프레소 머신과 에어프라이어라니 먹는 것 좋아하는 사람 아니랄까 봐 이유도 참 나다. 이 글 괜찮을까. 이런 얘기를 하려고 쓰던 게 아닌데. 모르겠다. 


 ‘의지’와 ‘노오력’으로 습관과 행동을 바꾸기 어렵다. 그래서 재택근무에 적응하는 것은 집에서 일하지 못하는 이유에서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나를 집에 잡아두는 데 필요한 당근은 무엇인지 생각해야 한다. 그렇게 당근을 찾아 당근을 흔들며 나를 집에 붙잡아 두고 일을 시키자. 이 글 괜찮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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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일은 여자가 해야지'는 일과 여성, 프리랜서의 이야기를 다루는 팟캐스트입니다. 매거진 <딴짓> 박초롱과 매거진 <프리낫프리 Free, not free> 이다혜가 공동 진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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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by Djurdjica Boskovic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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