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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다이구 Sep 04. 2021

포스트모더니즘의 함정

평등과 존중이라는 선물, 이데올로기라는 함정

저번 글에서 우리는 모더니즘에 대해 알아보았다. 모더니즘은 인간을 신으로부터 분리시키려는 움직임이었다. 이를 통해 얻은 귀중한 교훈은 인간은 우리 생각보다 이성적이지 못하고 합리적이지 못하다는 것이었다. 이 교훈은 쉽게 얻는 것이 아닌 환경오염, 자원고갈, 인권탄압, 그리고 두 차례의 세계대전으로 얻은 뼈저린 교훈이다.

각 진영의 대표, 미국과 소련

포스트모더니즘은 전 글에서도 언급했듯, 탈이성주의와 다원적 사고로 대표된다. 모더니즘에는 정답이 있었다. 바꾸어 말하자면, 진리가 있었다. 예를 들어, 나치의 우생학에선 모든 인종 중에 게르만인이 가장 우월하고 이는 진리로 떠받쳐졌다. 산업, 공장에서의 진리는 생산력이었다. 노동력 착취는 생산력을 늘리기 위한 것이기에 합리화되었다. '진리'를 위한 과정은 정당화될 수 있었다. 자유진영에서는 민주주의가 진리이었다. 그 외에 것은 '악' 그 자체로 인식했다. 공산진영에서도 마찬가지다. 공산주의 공산주의가 아닌 것은 모두 악마의 것으로 생각했다. 공산주의만이 진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의 다원적 사고에는 정답이 없다. 따라서 진리도 없다. 나도 맞고, 너도 맞고, 그도 맞고, 그녀도 맞고, 그들도 맞고, 우리도 맞다. "틀리지 않았다, 다를 뿐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을 설명하는 가장 좋은 문장이라고 생각한다. 덕분에, 수 만 가지의 이데올로기가 존재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이성의 차가움에 떨던 우리에게 감성의 따뜻함을 선물해 주었다. 피부색으로 차별받지 않게 해 주었다. 성별로 차별받지 않게 해 주었다. 나이로 차별받지 않게 해 주었다. 가난으로 차별받지 않게 해 주었다. 최소한 이러한 이유로 차별받지 않도록 열심히 싸운다. 덕분에 우리는 인류 역사상 가장 평등한 시대에 살고 있다.

포스트모던니즘을 산물로 인종간 평등, 여성인권 향상 등이 있다.

그렇다면 포스트모더니즘이 인류가 추구해야 할 최종 목표인 것일까? 지금 세상은 그 어느 때보다 평등하고 부유하며 평화롭다. 아직도 전쟁을 치르고 있는 나라가 몇 있지만 그래도 인류 역사를 통틀어  이 만큼 평화로운 시대를 찾아볼 수 없다. 마치 '인류의 역사가 지금을 위해 열심히 달려온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아쉽게도 포스트모더니즘도 한계가 점점 드러나고 있다. 아니, 어쩌면 인간의 한계일 수도 있다.


"틀리지 않았다, 다를 뿐이다" 이 문장이 전제가 되려면 일단 나와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존중해야 한다. 하지만 인간은 그러지 못한다. 나와 다른 사람을 배척하고 싸우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다. 서로 존중할 생각이 없는데 이데올로기는 우후죽순으로 생겨나고 있다. 그리고 이데올로기의 추종자들은 자신의 이데올로기가 진리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레디컬 페미니스트(극단적 페미니스트)들은 자신들이 절대선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의견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모두 젠더 감수성이 부족한 '악'으로 지정한다. 래디컬 비건 (극단적 채식주의자)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자신이 절대선이라고 깊게 믿는다. 자신들은 생명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채소만을 먹기 때문이다. 고기를 먹는 사람들은 생명 존중이 없는 '악'으로 지정한다. 레디컬 안티 페미니스트 (극단적 반페미니즘)도 마찬가지이고, 레디컬 인바이러멘탈리스트 (극단적 환경주의자)도 마찬가지이고, 극단적 평등주의자, 인종차별주의자, 모두 마찬가지이다.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진리를 없앤 줄 알았더니, 이게 웬걸? 진리를 수 만 가지를 만들어 추종자들끼리 서로 싸우게 만들었다.


전 하버드 대학교와 토론토 대학교에서 심리학 교수직을 역임했던 조던 피터슨은 자신의 저서 '인생을 바꾸는 12가지 법칙'에서  극단적 이데올로기 추종자들을 종교인과 같다고 말했다. 많은 이데올로기 추종자들은 기성 종교를 비판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자신들도 일종의 종교인이 되어버린 것이다.

상대를 사회적 매장을 시키는 이데올로기의 전쟁도 결국, 사람을 죽이는 전쟁이다.

21세기는 평화로운 시대이다. 겉으로 보기엔 말이다. 하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아주 치열한 이데올로기의 전쟁(Ideological War)이 존재한다. 이데올로기의 추종자들이 인터넷에서, 길거리에서, SNS에서, 책에서, 언론에서 아주 치열하게 싸운다. 이는 사회를 아주 불안정하게 만드는 요인인데 오히려 정치인들은 한쪽 편을 들어주고, 다른 쪽을 공격하는 식으로 자신의 지지층을 만드는 정치적 행동을 보인다. 이는 극단적 이데올로기 추종자는 광신도적 경향을 보이기 때문에 자신을 지지해주는 정치인의 아주 충성스러운 지지층이 되어주기 때문이다.


또한, 과학을 숭배하던 모더니즘을 비판하는 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과학을 아예 등져버리는 이데올로기들도 등장한다. 특히 생물학을 완전히 무시하는 어젠다들이 나온다. 아직은 이런 비과학적 이데올로기가 주류는 아니지만, 이 상황이 지속된다면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런 이데올로기들의 특징은 기존의 과학, 종교, 철학 등, 그 어느 것에도 기반을 두지 않는다는 것이 특징이다. 그래서 '아무도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다'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는데, 이는 곧 '나만이 옳다'라는 생각으로 쉽게 변질된다. 자신, 그리고 해당 이데올로기를 따르는 추종자들만이 옳다는 생각은 자신들의 사회적 분란을 일으키는 행위를 정당화시킨다. 놀랍게도 모더니즘의 문제가 여기서도 똑같이 발생하는 것이다.


너무 포스트모더니즘의 단점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했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은 우리에게 이례 없는 평화와 평등의 시대를 열어주었다. 획일적 사고에서 억압받고 차별받던 사람들을 해방시켰다. 하지만, 동시에 혼란의 시대를 열어주었다. 이리저리 몰아치는 이데올로기의 파도에서 우리는 길을 잃고 방황한다. "자신의 이데올로기만이 절대선이다"라는 생각을 가지는 순간, 우리의 배는 목적지에서 아주 벗어난 곳으로 휩쓸려간다. 이런 상황에서 많은 사람들은 허무주의에 빠진다. 너도 맞고 나도 맞다면, 결국 정답이라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정답 없는 인생에서 우리는 허무주의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린다. 허무주의에 대해선 다음 글에서 나눠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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