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다이구 Sep 16. 2021

밤마다 불안함과 우울감이 찾아오는 이유

포스트모더니즘과 불안함, 우울감



허무감, 무기력감, 그리고 우울감까지, 이 모든 증상들은 현대인들의 불치병이다. 치료하고 싶어도 못하고 영원히 이 부정적인 감정들에 빠져 허우적거린다. 이 현상은 특수한 현상이다. 쉽게 말하자면, 옛날에는 이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자료에 의하면 모든 나이대의 사람들의 우울증 환자 수가 시간이 흐를수록 증가한다. 특히 20대는 2012년부터 2018년까지 6년간 86.5%나 증가했다. 젊은 사람들의 우울증 증세가 아주 특수적인 현상이라는 증거다. 여기에 치료를 받지 않는 사람들, 무기력과 인생에 대한 허무감을 느끼는 사람까지 추가하면 그 수는 엄청날 것이다.

많은 현대인들이 불암감, 우울증에 시달린다. 이는 자연스러운 현상이 절대 아니다.


사회 전체가 이런 현상을 겪는다는 것은 시대의 문제라고 밖에 볼 수 없다. 현재 21세기에 만연한 철학, 사상, 트렌드에 무언가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많은 요소가 있다. 스마트폰 의존증, SNS 의존증, 좁아지는 취업문, 물가상승 등등 여러 사회문제가 결합되어 만들어진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21세기를 대표하는 사상, 포스트모더니즘과 유물론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 중, 불안함과 우울감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상대적 진리주의로부터 나온다.


먼저, 포스트모더니즘은 인간에게서 진리를 삭제시켰다. 정확히는 모든 것을 진리로 만들어 버렸다. '너도 맞고, 나도 맞고' '틀린 건 없다, 다를 뿐이다.', '정답은 없다' 같은 말들은 평등을 외치는 구호같이 들린다. 하지만 인생에서 '정답'을 지운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런 '틀린 건 없다'라는 사상을 상대적 진리주의라고 한다. 상대적 진리주의는 포스트모더니즘만의 특징은 아니다. 상대적 진리주의의 시초 격인 사람은 고대 아테네의 소피스트 프로타고라스이다. 소크라테스가 비판한 이 소피스트들은 상대적 진리주의를 통해 토론의 제왕이 될 수 있었다. 모든 것을 맞다고도 또는 틀리다고도 할 수 있는 상대를 어떻게 토론으로 이기겠는가? 소피스트의 탄생 이후 상대적 진리주의는 유행처럼 퍼져나갔다. 하지만 이내 상대적 진리주의의 문제점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나침판이 없는 항해사는 얼마나 불안하겠는가?

상대적 진리주의의 문제점은 발전이 없다는 것이다. 누가 봐도 문제가 많아 보이는 일도 정당화시키는 수단이 되었다. '정답'이 없어진 인간은 나침판을 잃어버린 선장같이 이리저리 방황하는 꼴이 되었다. 나침판이 없는 채로 항해를 하는 선원들과 선장이 얼마나 불안하겠는가? '내가 제대로 가고 있기는 한 건가?'라는 생각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제대로 된 방향으로 가지도 못할 것이다.


요즘 서점에 가보면 이런 류의 책들이 많다. 예를 들면, '게을러져라', '하루를 낭비해라', '죽도록 놀아라', '술을 마시고, 방탕하게 놀아라', '욕구에 충만해라' 같은 내용을 전달하는 책들이다. 누가 봐도 틀렸다. 게으른 삶을 사면, 당장은 편하게 살 수 있겠지만, 결국에 찾아오는 것은 쾌락 후의 허무감뿐이다(현자 타임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이런 삶도 '뭐 어때? 인생에 정답이 어디 있어?', '당신처럼 열심히 사는 것도 좋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삶의 방식이 틀린 건 아니야'라고 스스로를 정당화시킨다. 정말로 미안하지만, 아니다. 당신의 삶은 틀렸다. 이 문장에 반감을 가지는 사람이 아주 많을 것이다. 욕먹을 각오는 이미 했다. '틀렸다'라는 문장 자체가 허락이 안 되는 세상에 살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젠 현실로 돌아와야 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우리 멋대로 살아도 문제없을 만큼 호락호락한 세상이 아니다. '어차피 잘 사는 사람들이나 잘 사는 거지, 나는 지금 상태로 만족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정말로 만족하는가? 밤마다 자기 전에 찾아오는 미래에 대한 불안함, 인생을 낭비하고 있다는 우울감, 그 외의 모든 부정적인 감정들이 정말 괜찮은가? 분명한 것은 그 상태에서 만족하고 머무른다면, 당신은 평생 죽을 때까지 이 부정적인 감정들에 허우적거려야 한다. 간단한 수학이다.

가치와 의미가 없는 삶은 불안하고 허무할 수밖에 없다.

물론, 정말로 괜찮은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이런 부정적 감정 없이 편히 잠에 들고 현재 삶에 만족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상관없다. 평범한 인생에 소소한 행복을 느끼며 살아가는 것을 틀렸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삶이 문제가 있음을 스스로가 느끼는데도 정당화를 하며 내일도 모레도 똑같은 틀린 삶을 계속 살아가는 삶이 틀렸다는 것이다. 애초에 본인 삶의 소소한 행복을 느끼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 글을 읽고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본인도 자신의 삶의 문제를 느끼고 바뀌어 보려고 이 글을 읽는 것 아닌가?


하지만 이런 삶을 살고 있는 당신을 그저 책망하려는 건 아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이런 삶을 살아온 당신이 밤마다 불안감과 우울감을 느껴 어떻게든 바꿔보려고 이 글을 읽는 것이 아닌가? 바뀔 수 있다. '틀린' 삶을 '올바른' 삶으로 바꾸는 것이다. '틀린', '올바른'이 단어가 싫으면, 그냥 한번 '다른' 삶을 살아보자. 이 '다른' 삶이란, 고리타분한 도덕적 가치를 지니고 초월적인 의미를 가진 삶이다.


자아의 성장, 자기 계발, 초월적인 의미는 내다 버린 채, 당장의 편안함과 쾌락만을 쫒는 것이 정당화되는 세상, 심지어는 트렌드가 되어버린 세상에서는 불안감과 우울증, 그리고 허무감이 찾아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우리는 세상에 '틀림'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틀림'이 있음을 알게 되면 자연스레 '옳음'도 있음을 알게 된다. 자아의 성장은 거기서부터 시작된다. '틀림'을 피하고 '옳음'을 추구하는 행위가 자아성장, 자기 계발의 시작점이다. 말하자면, '신념'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신념은 인생의 목표를 정해준다

포스트모더니즘에서 '틀린 건 없다. 다를 뿐이다'라고 외친다. 과연 그럴까?

하버드 대학교와 토론토 대학교에서 심리학 교수직을 역임한 조던 피터슨은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그 과정이 긍정적인 감정을 느끼게 해 준다고 말했다. 그리고 오직 그 과정을 통해서만 긍정적인 감정을 느낄 수 있다고 했다. 여기서 말하는 긍정적인 감정은 일시적인 만족감이나 쾌락이 아니다. 더 나은 인간이 되어 간다는 그 기분, 나 자신이 사랑스러운 그 기분, 인생을 정말 잘 살고 있다는 그 기분, 이것은 직접 느껴봐야만 알 수 있다.





이전 02화 포스트모더니즘의 함정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