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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다이구 Sep 21. 2021

군중심리의 위험성

군중심리에서 자유로워지는 법

군중심리에 관한 연구들에 대해서는 많이 들어보거나 봤을 것이다. 아무리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행동도 다수의 사람이 하게 되면, 개인도 따라 하는 실험들 말이다. 진화심리학에서 군중심리는 단체생활을 하는 인간이 그룹에서 모나지 않기 위해 생긴 습성이라고 설명한다. 또한 집단에 동화되어 결국엔 비상식적인 행동이라도 정당하다고 생각하게 되고 또 그렇게 믿게 된다고 한다.

군중에 속해 있을 때는 그 어떤 폭력과 비난도 정당하다고 믿게 된다.

요즘 인터넷, 유튜브, SNS 등을 보면 이 군중심리가 아주 잘 보인다. 다 같이 몰려다니며 특정 인물을 비난하거나 특정 이슈에 대해 공통된 입장을 내놓는다거나 하는 식이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자신, 그리고 자신이 속한 집단은 '정의롭다', '정당하다'라는 강한 믿음이 있다는 것이다. 대부분 그런 믿음은 '다수의 사람이 그렇게 믿기 때문'이라는 이유에서 나온다. 또 다른 특징은 자신과 또 자신의 집단에 반대되는 의견에 대해서 과할 정도로 적대시한다는 점이다. 


군중심리는 온라인뿐만 아니라, 정치, 사회이슈, 학교, 직장, 거의 모든 곳에서 발생하는 현상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 적어도 한 분야에서 군중심리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군중은 이성적인 판단이 어렵다. 다수의 의견을 하나로 제대로 통합하는 것이 어려울뿐더러 자신들과 반대되는 의견에 적대시하는 특성 때문이다. 또한 같은 의견을 품은 사람이 여러 명이 모이게 되면 그 의견과 감정이 증폭화된다. 예를 들자면, '감옥에 보내라'가 '감옥에서 영원히 썩게 해라'가 되고, 이것이 또 '사형시켜라'로 바뀌는 것이다.

이런 군중심리에 대해 잘 묘사한 사건이 그 유명한 예수 십자가 사건이다. 불과 며칠 전에 호산나(우리를 구원하소서)라며 예수를 찬양하던 군중이, 예수가 십자가 형을 받자마자 돌변하여 돌을 던지고 침을 뱉었다. 심지어는 그의 열두 명의 제자들 조차 모두 도망가거나 배신했다. 이 사건은 군중이 얼마나 비이성적이고 증폭되는지 보여주는 예시이다. 한때는 세주처럼 열렬히 찬양했지만, 여론이 바뀌면 죽일 듯이 달려든다. 유튜브, 연예인, 정치인 수많은 사람들이 한때는 예수처럼 열렬한 사랑과 지지를 받지만 여론이 바뀌면 죽일 듯이 달려드는 모습과 유사하다. 군중은 중간이 없다. 열렬한 사랑을 주거나, 죽이려고 하거나, 둘 중 하나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군중심리에 영향을 받지 않고 우리가 스스로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있을까? 두 가지가 있다. 바로 인지와 이해이다.


첫 번째, 군중은 비이성적이라는 사실을 인지하자. 군중은 합리적인 의견을 내지 못한다. 이미 그들의 사고는 증폭되어 있다.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군중이 옳았던 적은 아주 소수이다. 역사적으로 군중들은 자기 합리화, 정당화, 극단적 성향, 그리고 폭력성 등을 보였다. 그러니 우리는 의심해야 한다. 일단 그들이 비이성적인 상태라는 것을 인지한다면, 그들의 성난 파도와 같은 의견에 휩쓸려가는 것을 막을 수 있다.


두 번째, 군중은 여러 사람의 집합이라는 개념을 버리자. 이제부턴 군중은 그 자체로 하나의 개체라는 개념을 이해해야 한다. 우리가 군중의 비이성적인 의견을 신뢰하는 이유는 바로 '여러 사람이 그렇게 믿기' 때문이다. '수 백 명, 수 천명, 수 만 명의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한다면, 거기에 무슨 이유가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다. 하지만, 사람이 군중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군중이 사람을 움직인다. 군중이 사람을 세뇌시킨다고 생각하면 쉽다. 군중은 여러 사람의 의견, 분위기, 생각이 아니라 그저 단 하나의 의견, 분위기, 생각이다. 우리는 군중의 개념을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

군중이 옳은 정의를 추구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폭력과 비난 등이 정당화되어서는 안 된다. 군중이 위험한 이유는 그것이다. 그들이 추구하는 것은 정의로워도 그들의 행동이 정의롭지 않기 때문이다. 프랑스혁명, 황건적의 난 등 역사적으로 정의를 추구한 운동이 있었지만, 그들의 정의 또한 증폭되어, 잘못된 방향으로, 폭력적으로 변질되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죄 없는 사람이 죽었고 세상은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정의는 그런 식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누군가 잘못을 했다면 정당한 법적 처벌과 제약, 그리고 반성과 용서를 통해 정의가 이루어진다. 인민재판은 정의도 뭣도 아니다. 그저 군중의 행패일 뿐이다.


적절한 처벌을 못 받았다 생각되어도 인민재판은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 한 번 인민재판이 정의로웠다 해도, 그다음, 또 그다음 계속 일어날 모든 인민재판이 모두 정의로울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군중의 감정은 증폭되고 부당한 처벌이 내려질 뿐이다. 옛날에는 마을에 문제가 생기면 마을 사람들이 돌을 던져 심판했다. 적절한 재판도 건너뛰고 즉결 처분했다. 우리는 이런 인민재판이 정의롭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 지금 현재 상황을 봐보자. 사실여부고 뭐고, 죄의 경중이고 뭐고 일단 군중이, 여론이 한 사람을 지목하면 모두 몰려들어 돌을 던진다. 옛날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다. 정의롭지 못하다. 우리는 군중심리가 위험하다는 것을 인지하고 지금부터라도 바뀌어야 한다.


군중의 의견을 일단 의심하고 보자. 그들의 사고와 감정이 너무 증폭되어 극단적으로 변하진 않았는지 확인해보자. 그 작은 움직임이 사회 정의의 한 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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