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태와 위버맨쉬
1889년 1월, 이탈리아 토리노의 카를로 알베르토 광장에 고통에 몸부림치는 말의 비명이 울린다.
마부 | 아니, 이 자식이 왜 이래?
마부가 사정없이 말을 채찍질을 했다.
하지만 말은 채찍질에 신음할 뿐 앞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다리를 쩔뚝이는 것을 보니 발목이라도 삔 것일까 하고 Q는 생각했다. 하지만 마부는 신경 쓰지 않았다. 마부에게 말은 마차를 끌어야 하는 존재였다. 마차를 끌지 못하는 말은 가치도 없다는 듯 신경질적으로 채찍을 가했다.
중년 남성| 그만하시오! 제발 그만하시오!
그때 한 중년 남자가 울부짖으며 거리로 뛰쳐나왔다. 그는 말에게 달려가 두 팔로 말의 목을 감싸 안았다. 하마터면 마부의 채찍에 남자가 맞을 뻔했다.
중년 남성| 제발 그만하란 말이오. 이 말은 아무런 잘못도 없소.
남자는 눈물을 흘리며 울부짖었다. 19세기의 남자 치고는 동물감수성이 상당히 풍부한 사람이다.
마부 | 아니 이 사람이 미쳤나? 비키시오! 마부가 소리쳤다.
하지만 남자는 말을 끌어안은 채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Q | 이거 상황이 안 좋은데 하필 지금이라니.
Q는 중얼거렸다.
Q는 단번에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 알아챘다. 바로 토리노의. 말 사건. 지금 저기 말을 두 팔로 끌어안고 있는 남성은 니체일 것이다. 니체는 이 사건을 기점으로 정신이 나가버리고 죽을 때까지 광인으로 살게 된다. 그리고 그건 Q에게 있어 무척 안 좋은 소식이다. 광인에게 상담을 받을 순 없기 때문이다.
Q의 시간이동 장치는 특정한 시간으로 이동하는 개념이 아니다. 장치에 만나고자 하는 철학자의 이름을 검색하면 그 인물이 살고 있는 무작위 시간대에 근처 공간으로 이동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가끔 이렇게 곤란한 시간대로 이동하기도 한다.
Q가 고민하고 있던 찰나 말은 절뚝거리며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말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니체는 훌쩍이며 옆으로 비켰다. Q는 재빨리 니체에게 다가갔다.
Q | 괜찮으십니까?
니체 | 괜찮습니다.
니체는 옷소매로 하염없이 쏟아지는 눈물을 닦아내고 있었다. 그 모습에서 현대인이 생각하는 우버맨쉬 (초인)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Q | 근처 카페로 가시죠. 제가 커피라도 사드리겠습니다. 따뜻한 커피를 마시면 조금 진정이 되실 겁니다.
Q의 선뜻 건넨 제안에 니체는 의외로 쉽게 응했다. 이 시기의 니체는 사람의 손길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을 수도 있겠다고 Q는 생각했다.
<카페>
Q와 니체는 광장 근처의 카페의 테라스에 앉았다. 니체는 자신 앞에 놓인 에스프레소를 하염없이 바라만 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미 반쯤 정신이 나간 것처럼 보였다.
Q는 어떻게든 니체가 완전히 미쳐버리기 전에 자신의 임무를 수행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Q는 쓴 에스프레소를 벌컥벌컥 마시고 잔을 탁자에 탁 내려놓았다. 그리곤 서류가방에서 자신이 대리 상담을 받아야 할 편지를 니체 몰래 꺼내 읽었다.
요즘 여자친구와 권태기인 것 같아 고민입니다. 연애 초반에는 서로 바라만 보고 있어도 즐거웠는 데 요즘은 서로 만나도 핸드폰만 보고 있고, 가끔 대화를 하면 그마저도 곧 말싸움으로 번지게 됩니다. 하지만 저는 절대 제 여자친구와 헤어지긴 싫어요. 아직 여자친구를 사랑하거든요. 하지만 여자친구는 이미 저에 대한 마음이 식은 것 같아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니체에게 물어봐주세요. 감사합니다.
Q는 난감해졌다. 정신이 반쯤 나가있는 이 사람에게 어떤 수로 연애 상담을 해야 할지 막막해졌다. 게다가 왜 하필 평생 연애를 해본 적 없는 니체에게 연애 상담을 신청했는지도 Q는 의문이었다.
Q | 저... 혹시 부인이 있으십니까?
Q는 어렵게 말을 꺼냈다. 니체가 모솔이라는 사실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짓궂은 질문을 던졌다.
니체 | 아니요. 없습니다. 그쪽은 부인이 있으신가요?
Q | 아니요. 저도 없습니다. 하지만 만나고 있는 여자는 있습니다. 하지만 요즘 사이가 안 좋아져서 조만간 헤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니체 | 그거 유감이군요.
Q | 혹시 제 고민 이야기 좀 들어주시겠습니까?
니체 | 기꺼이 들어드리죠. 이렇게 맛있는 커피도 사주셨으니. 하지만 도움이 되진 않을 겁니다. 부끄럽지만 평생 애인을 가져본 적이 없는 사람인지라...
Q | 그냥 이야기만 들어주시면 됩니다. 처음에는 정말 뜨거운 사랑을 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니 흔히 권태기라고 하는 것이 찾아온 것 같더군요. 서로 대화도 잘하지 않고요. 그나마 대화가 막 시작되나 싶으면 곧 말싸움이 되더군요. 그리고 무엇보다 저 쪽에는 이미 마음이 차게 식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는 포기가 안되더군요. 저는 여전히 사랑하거든요. 헤어지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뭐... 이미 한쪽에서 끝난 이 관계를 어떻게 다시 회복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Q는 나름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고 생각하며 자축의 에스프레소 한 모금을 했다. 니체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어딘가 이미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초점 없이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Q는 "그냥 이야기만 들어주시면 됩니다"라고 말했다고 정말 그냥 이야기만 들어줄 심산일까 걱정했다.
니체 | 예전에 좋아하던 여인이 있었습니다. 아니, 사실 꽤 많았습니다. 몇 년 전엔 루 살로메라는 여성을 사랑했습니다. 그녀의 지성과 매력은 다른 어떤 여성도 가지진 못한 것이었으니 제가 그녀에게 사랑에 빠진 것은 어쩌면 어쩔 수 없는 것이었을 겁니다.
니체는 조심스럽게 떨리는 목소리로—아직 시선은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말하기 시작했다.
니체| 두 번이나 청혼을 했지만 모두 거절당했습니다. 어찌 되었건 사랑이라는 것은—연인관계로 발전하기 위해서는—양방향의 감정이 필요한 법이죠.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늘 나의 사랑이 과연 '소유욕'은 아닐지 경계해야만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나의 것으로, 결과적으로 나와 같은 것으로 만들려 하는 욕심이 아닌지 경계해야 합니다.
니체는 점점 목소리에 힘을 얻어가며 이야기했다. 하지만 눈은 여전히 Q를 쳐다보지 않았다. 이제 보니 니체는 일부러 Q의 눈을 회피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점점 고양되었다.
니체 | 말싸움이란 무엇이죠. 곧 다른 이의 의견을 나와 같은 것으로 만들기 위한 행위입니다. 그건 분명히 소유욕이죠. 이는 철학자들에게도 마찬가지로 나타납니다. 철학은 지혜에 대한 사랑입니다. 사랑을 뜻하는 Philo와 지혜을 뜻하는 Sophy가 합쳐진 말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어떻죠? 그들은 지혜를 소유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자신과 똑같이 만들기 위해, 그리하여 자신의 힘으로 사용하기 위해 지혜를 더럽힙니다. 그들은 더 이상......
니체는 컥컥거리더니 그제야 드디어 자신 앞에 놓인 에스프레소를 마시기 시작했다. 니체는 흠흠 거리며 목을 정리했다. 목에 걸린 사레가 내려가면서 그의 흥분도 같이 내려가는 것처럼 보였다.
니체 | 죄송합니다. 제가 흥분을 좀 했군요.
Q | 전혀요. 저도 동감하는 바입니다. '인간이 궁극적으로 사랑하는 것은 자신의 욕망이지 그 욕망의 대상은 아니다.'일까요?
니체 | 정확합니다. 그나저나 제가 권태기에 대해 감히 할 수 있는 말은 없군요. 권태기 단계까지 가보지도 못한 제가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다만 인생의 권태에 대해서라면 할 말이 있죠. 권태는 결코 나쁜 것이 아닙니다. 권태가 없다면 우리는 성장할 동기가 없어질 테니 말입니다. 안정된 상태가 계속 유지된다면 우리는 안주하고 싶어 집니다. 권태의 순간이 오면 우리는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직감하게 됩니다.
니체는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중간중간 입이 마르면 에스프레소를 한 모금 마시는 여유까지도 보였다.
니체 | 그전까지는 순풍이 불어 순항하는 배였다면, 권태의 때에는 무풍의 때이죠. 스스로 노를 저어야 합니다. 그러면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가만히 앉아서 '왜 바람이 불지 않는 거야. 이제까지는 잘 불었잖아!'라고 불평해 봤자 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사랑도 마찬가지이지 않을까요?
Q | 그럼 불안해하거나 불평하기를 그만두고, 다시 사랑을 받기 위해 노력하라는 말씀인가요?
Q의 질문을 들은 니체는 미간을 찌푸리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니체 | 왜 사랑받기 위해 변하려 하는 거죠? 자기 자신을 그렇게 쉽게 포기하나요? 물론 우리는 늘 변화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건 더 나은 내가 되기 위함이지 결코 다른 사람의 사랑 혹은 인정을 받기 위해서 그래서는 안돼요. 말하자면 사랑받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 없이도 견딜 수 있는 사람이 더욱 이상적인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연인과의 권태는 고통스럽습니다. 이별도 몹시 고통스럽습니다. 하지만 그 고통을 기회로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당신은 권태로 고통스럽지만 그 때문에 변화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잖아요? 고통마저도 긍정할 수 있는 사람이 되세요. 고통은 자신을 성장시킬 수 있는 기회입니다. 말하자면 위버맨쉬(초인)가 되라는 겁니다.
Q | '창조의 기쁨이 존재하려면 산모의 고통도 존재해야 한다'는 이야기군요.
니체는 뭔가 깨달음을 얻었다는 표정을 짓고 또다시 허공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더니 옅은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니체 | 커피 잘 마셨습니다. 긴 이야기 들어주셔서 감사하군요. 기회가 되면 또 만나 이야기를 나눴으면 좋겠네요. 최고의 사랑은 우정입니다.
거리로 나가던 니체는 갑자기 뒤로 휙 돌더니 Q에게 다시 다가왔다.
니체 | '창조의 기쁨이 존재하려면 산모의 고통도 존재해야 한다' 좋은 말이군요. 지금 제가 쓰고 있는 글에 써도 되겠습니까?
Q는 "아뿔싸"하고 자신의 이마를 약하게 탁 쳤다. "창조의 기쁨이 존재하려면, 삶에의 의지가 자신을 영원히 긍정할 수 있으려면, '산모의 고통'도 영원히 존재해야만 한다"는 니체의 우상의 황혼에 나오는 문장이다. 우상의 황혼은 올해인 1889년에 출판되는데 아직이었나보다.
Q | 물론이죠. 마음껏 사용하셔도 됩니다. 오히려 영광이죠.
니체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고 다시 거리로 나섰다.
Q | 부트스트랩 패러독스인가... 다음부터 조심해야겠군. 아무튼 상담 내용은 대충 이 정도인가...
Q는 자신이 니체와 나눴던 대화 내용을 노트에 요약해 적었다.
1. 자신의 사랑이 소유욕은 아닌지 확인하기. 소유욕은 다른 사람을 나의 것으로, 나와 같은 것으로 만들려는 욕구.
2. 권태는 곧 성장할 동기. 연애 초 -> 순풍 속에서 순항하는 배. 권태 -> 무풍 속의 멈춰버린 배. 이젠 직접 노를 저어야 할 때.
3. 사랑받는 사람이 아닌 사랑 없이도 견딜 수 있는 사람이 되기. 권태 / 이별은 고통스럽지만 성장과 변화의 기회. 고통을 긍정하라 -> 위버맨 쉬
주석
1. 토리노의 말 사건 | 1889년 이탈리아 토리노 광장에서 일어난 사건. 말을 채찍질 하는 마부를 본 니체가 거리로 뛰쳐나와 말을 끌어안고 그만하라며 애원했다. 그 후 니체는 그 자리에 쓰러졌고 이후 광인이 되었다고 한다.
2. "인간이 궁극적으로 사랑하는 것은 자신의 욕망이지 그 욕망의 대상은 아니다."은 <선악의 저편>에 등장한 문장이다.
3. 부트스트랩 패러독스 | 시간여행 이야기에서 어떤 물건이나 정보가 원래의 출처 없이 과거와 미래를 순환하며 존재하는 모순. 시간여행자가 셰익스피어에게 그의 전집을 보여주고, 셰익스피어가 그 내용을 베낀다면 그 작품은 도대체 누가 처음 쓴 것인지 알 수 없게 된다는 식의 모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