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은 악이 아니다.
폭설이 내린 날에 그런 생각을 했다. 고통은 악이 아니라고.
문을 열어 보니 세상이 눈에 덮여 있었다. 부츠를 신고 한 걸음 내딛으니 종아리까지 잠길 정도로 많은 눈이 내렸다. 부츠를 신은 의미는 온데간데 사라진 채 눈을 헤집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눈은 순식간에 목도리와 겉옷에 달라붙어 몸을 축축하게 만들었다. 거센 바람에 날리는 눈은 엄청난 속도로 내 얼굴을 강타했다. 눈이 강타하는 지점에 발생하는 따끔거리는 통증에 고개를 제대로 들 수도 없었다.
말 그대로 재난이었다. 학교도 직장도 문을 닫고 인도는 물론 도로에도 눈이 쌓여 사람과 자동차 모두 혹시 미끄러질까 노심초사하며 이동하고 있었다. 거리에는 시청에서 제설하러 나온 사람들과 나처럼 이례적인 폭설을 직접 체험하기 위해 나온 사람들뿐이었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불쾌한 감각이 느껴졌고 고통이 느껴졌다. 내 반대편에서 걸어오는 저 사람도 똑같은 감각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와 같이 그 사람의 얼굴에도 즐거운 미소가 띄어져 있었다.
"확실히 산책하기 좋은 날씨는 아니네요"
그 사람은 나를 지나치며 말했고 우리는 둘 다 웃었다. 반대편 거리에서는 중년 부부로 보이는 사람 둘이 보였다. 남자는 미끄러져 넘어졌고 여자는 남자의 손을 잡고 일으켜 세우려고 했다. 하지만 눈 속 깊이 빠진 엉덩이 탓에 여자의 완력으로 남자를 꺼내기는 역부족이었던 것 같다. 여자도 앞으로 꼬꾸라졌고 두 팔로 간신히 바닥을 지탱해 얼굴이 눈에 닿는 것을 겨우 면했다.
아까 전 나는 맨손으로 눈덩이를 만들어 던져 보았다. 그리고 맨손으로 눈을 만지면 아주 차갑다는 사실을 1년 만에 다시 깨달았고 후회했었다. 나는 그 둘을 보며 그들의 엉덩이가 얼마나 시릴지, 그리고 여자의 손이 얼마나 시릴지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깔깔깔 웃었다.
그 순간 오직 고통만이 인간의 삶을 가치 있게 만들어 준다는 아나톨 프랑스의 문장이 드디어 이해되기 시작했다. 그의 말 그대로 고통과 사랑은 한 쌍으로써 존재하며 인간의 삶을 아름답게 만들어 준다 ¹. 쾌락이 악이 될 수 있듯이 고통 또한 선이 될 수 있다.
현대인은 고통공포증에 시달리고 있다. 고통에 몸서리치며 고통을 두려한다. 현대인에게 고통은 최고악이다. 현대 사회의 고통은 그저 고통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고통의 의미와 가치를 가져가 버렸다. 그건 고통이 아니다. 고문이다. 고문은 분명히 악이다. 우리는 고문과 고통을 구분해야 한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현대인은 사랑이 사라졌다며 불평한다. 하지만 사라진 건 사랑이 아니다. 사랑 속의 고통이 사라졌다. 고통공포증은 사랑의 의미와 가치를 만들어 주는 고통조차 제거해 버렸다. 폭설 속에서 산책을 하며 느끼는 즐거움과 행복은 만약 폭설이 아무런 고통도 가져다주지 않는다면 그 의미와 가치를 잃어버릴 것이다. 그 누구도 폭설을 즐기기 위해 집 밖으로 나오지도 않을 것이다.
"고통을 즐기라"라는 문장은 모호하다. 정확한 표현은 "고통과 기쁨은 서로 반의어가 아니다"일 것이다. 고통 중의 기쁨은 공존이 불가능한 모순적 상태가 아니다 ².
고통이 악인 이유는 사랑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랑과 함께라면 그 무엇보다 빛난다. 마찬가지로 사랑이 선인 이유는 고통이 함께 있기 때문이다. 고통이 없는 사랑은 아무런 힘도 의미도, 가치도 얻지 못한다.
고통은 악이 아니다. 그런 생각을 해 보았다.
1. "고통과 사랑, 이 둘이야말로 인간 세상의 무궁무진한 아름다움이 샘솟는 한 쌍의 원천이다." <에피쿠로스의 정원>, 아나톨 프랑스
2.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로마서 5:3, 개역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