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무한 세상, 그럼에도 계속 살아가야 하는 이유
'최애로 보는 철학'의 두 번째 작품은 최근 큰 화제가 되었던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이다. 이 작품은 개봉 전부터 큰 관심을 모았는데 그 이유는 바로 은퇴한 줄 알았던 지브리 스튜디오의 미야자키 하야오의 복귀작이자 정말 마지막 작품이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부터 지브리의 큰 팬인 나도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빨리보고 싶었지만, 현재 캐나다에서 생활하고 있기 때문에 한국보다 2달 정도 늦은 12월 말이 되어서야 영화관에서 관람할 수 있었다. 한국에서는 꽤 호불호가 갈린다고 얼핏 들었는데 개인적으로는 만족하면서 보았다.
이번 영화가 가지고 있는 교훈은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바람이 분다'와 거의 비슷하다고 생각된다. 감독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주인공에게 투영하여, 마치 "나는 이렇게 살았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사시겠습니까?"라고 묻는 듯 보였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제국주의와 침략전쟁을 일삼는 당시 일본을 무척 싫어했다고 한다. 심지어 일본이 싫어서 일본 노래조차 안 들었다고 말할 정도였다. 하지만 군수업자인 아버지의 밑에서 윤택하고 풍요롭게 지냈으며, 심지어 전투기의 디자인에 강한 매력마저 느끼는, 감독 본인의 표현으로는 '저주받은 감각'을 타고났다고 한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의 주인공 마히토는 이런 미야자기 하야오의 어린 시절을 그대로 옮겨놓은 인물이다. 마히토는 태평양 전쟁의 여파로 엄마가 죽었으며 그로 인해 전쟁을 끔찍이 싫어하지만 군수사업을 하는 아버지의 밑에서 남들보다 윤택한 삶을 누리는 모순적인 삶을 산다.
사실 전쟁이 아니어도 인간은 누군가를 끊임없이 죽이며 살아간다. 살아가기 위해 동물을 죽이고 식물을 죽여서 영양분을 채운다. 기초적인 도덕적 관념이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살생을 거리껴하지만 모순적이게도 우리는 살아가기 위해 매 끼니마다 어떠한 존재의 생명을 빼앗아 먹는다. 그로 인해 우리의 몸은 건강하게 유지될 수 있다. 마치 전쟁을 팔아먹는 아버지 아래 윤택한 삶을 누리는 마히토처럼 말이다.
이러한 인간의 잔인한 모습을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는 잉꼬들의 모습으로 표현한다. 작품 내에서 잉꼬들은 인간을 잡아먹는 잔인하고 야만적인 모습처럼 연출된다. 하지만 가만 생각해 보면 그저 입장이 바뀐 인간과 동물의 모습일 뿐이다. 심지어 작품 내에서 등장한 잉꼬들은 어린 인간은 잡아먹지 않는 윤리적인 모습까지 보여준다. 현실의 인간과 전혀 다를 게 없다. 하지만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잉꼬들을 잔인한 존재로 인식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자신의 모습과 전혀 다를 게 없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하늘로 올라가 현실세계에서 인간의 아이로 태어날 와라와라라는 존재를 잡아먹는 펠리컨 또한 마찬가지이다. 본래 부부에게 아기를 물어다 주는 존재로 표현되는 펠리컨이 아이로 태어날 와라와라를 잡아먹는 장면은 세계의 부조리함과 무의미함, 그리고 모순을 잘 나타내는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펠리컨에게 어째서 와라와라를 잡아먹었냐고 추궁하는 마히토에게 펠리컨은 너무 당연한 대답을 한다. "살기 위해 먹었다". 바다에 물고기가 부족해지자 자신이 살기 위해, 그리고 둥지에 남아있는 새끼를 살리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와라와라를 사냥했던 것이다. 과연 펠리컨은 와라와라를 무자비하게 잡아먹는 악역이었을까? 아니면 둥지에서 굶고 있는 새끼를 위해 사냥을 하고 있는 펠리컨을 불태워 죽인 불꽃 소녀가 악역일까? 아니 애초에 이 세상에 선역과 악역이라는 개념이 존재할까?
영화의 마지막 마히토와 외증조부의 대화장면에서 외증조부는 현실세계의 아픔, 부조리, 모순, 고통이 없는 세상을 창조하려 했지만 자신이 만든 이 세계도 불완전하다고 이야기한다. 마치 부족사회부터 시작해서 왕정정치, 과두제, 공화정, 민주정, 사회주의, 민주주의 등의 정치체제, 혹은 실존주의, 허무주의, 염세주의, 이데아론, 실증주의, 스토아학파, 쾌락주의,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같이 이상적인 철학 사상을 매 시대마다 갈아 끼우지만, 결국 문제점과 부작용으로 인해 그 불완전함을 깨닫는 것과 같다.
그러한 이유로 외증조부는 마히토라면 완전무결한 세상을 창조할 수 있을 것이라며 자신의 자리를 물려주려 한다. 하지만 마히토는 이를 거절하고 원래 세상으로 돌아가려 한다. 이에 외증조부는 고통과 아픔밖에 없는 세상에 다시 돌아가려 하는 것이냐고 묻는다. 이에 마히토는 그런 아픔과 모순, 부조리 속에서 지금까지 그러했듯 앞으로도 살아갈 것이라고 답합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감독의 작품을 보다 보면 '살아간다' 혹은 '살아가' 같은 대사가 자주 등장한다. 기본적으로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세계관은 허무주의 혹은 염세주의적이다. 인간의 악한 내면과 세상의 부조림함을 인정한다. 하지만 우리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야 한다"는 메시지를 던져준다. 이는 철학 사상으로 볼 때 능동적 허무주의에 해당한다.
니체의 허무주의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바로 능동적 허무주의와 수동적 허무주의이다. 능동적 허무주의는 니체가 실존주의에 많은 영감을 받아 발상해 낸 철학 사상으로 인생의 무의미함을 인정하지만 이를 피하지 않고 직면하는 것을 강조하는 철학이다. 반대로 수동적 허무주의는 인생의 무의미함을 깨닫고 현실에서 도피하거나 염세적인 반응만 보이는 철학을 의미한다. 니체는 수동적 허무주의를 '더없이 추악한자'라며 강하게 비판했다.
이 두 사상은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 마히토와 그의 외증조부로 대표된다. 책에 빠져 살다가 세상의 부조리함과 무의미함을 깨닫고 현실세계에서 도피하여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 거기서 살려고 하는 외증조부, 그리고 이를 거부하고 현실세계로 돌아가 세상의 고통과 부조리, 무의미를 직면하고 일상생활에서 하루하루 자신만의 의미를 찾아가는 마히토는 각자 수동적 허무주의와 능동적 허무주의로 대표되는 것이다.
간혹 니체의 허무주의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저 니체를 '염세주의적인 사람'으로 바라볼 수 있다. 하지만 니체의 허무주의는 그런 철학이 아니다. 세상에는 절대적인 가치가 없다. 이것이 무슨 말이냐면 펠리컨이 악역인지, 불꽃 소녀가 악역인지 정해져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저 펠리컨과 불꽃 소녀가 존재할 뿐이다. 이는 이전에 다루었던 '진격의 거인으로 보는 실존주의'와 비슷한 맥락이다 (애초에 허무주의가 실존주의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 사상이다). 군수업자의 아들로 태어나 윤택한 삶을 사는 미야자키 하야오가 나쁘냐 안 나쁘냐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반대로 군수업자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제국주의와 전쟁을 반대하는 미야자키 하야오가 착하냐 안착하냐도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저 미야자키 하야오가 존재할 뿐인 것이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군수업자의 아들로 태어나 전투기의 미학에 빠지는 저주받은 감각을 가졌지만 동시에 반전주의적인 성향을 가진 한 존재로써 살아갈 뿐이다. 고통과 모순, 부조리, 죄책감 등이 있었겠지만 이를 도피하지도 염세적인 반응을 하지도 않고 그저 자신과 이 세상의 일부로써 인정하고 하루하루 의미를 만들어가면서 살아간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미야자키 하야오만의 특별한 여정이 미야자키 하야오의 삶이 된 것이다. 미야자기 하야오는 그렇게 살아온 것이다. 그리고 지금껏 자신의 작품들을 관람한 팬들에게 묻는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하고 말이다.
위 해석은 개인적인 견해와 해석이며 실제 작가가 의도했던 해석과 다를 수 있습니다.
작품 속 숨겨진 철학이 궁금한 자신의 최애 작품을 댓글에 써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