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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다이구 Jan 07. 2024

진격의 거인으로 보는 실존주의

벽의 의미

'최애로 보는 철학'의 첫 번째 주제로 '진격의 거인'으로 정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필자 본인이 재미있게 본 이유도 있고, 많은 사람들이 즐긴 작품인 이유도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진격의 거인은 대놓고 '실존주의' 철학을 담고 있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실존주의에 대해 미리 공부하고 진격의 거인을 보면 전혀 색다른 시각으로 작품을 즐길 수 있다.


실존주의는 본질주의와 함께 인간이라는 하나의 개체를 바라보는 관점이라고 할 수 있다. 실존주의의 가장 근본적인 명제는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이다. 벌써부터 이게 무슨 말인가? 싶을 수 있지만 생각보다 간단하다. 의자를 생각해 보자. 의자의 본질은 무엇일까? 바로 '사람이 앉을 수 있는 물건'이다. 만약 의자가 '사람이 앉을 수 없는 물건'이라면 그때부터는 '의자'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이 본질주의이다. 의자가 만들어지기 전부터 의자의 목적, 의미, 존재가치 등은 먼저 정해진다. 그다음에 의자가 만들어져 존재하는 '실존'의 단계로 넘어오는 것이다. '본질이 실존에 앞서는 상태'인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경우는 다르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경찰로 태어나거나, 사업가로 태어나거나, 장사꾼으로 태어나지 않는다. 일단 태어난 후(실존) 각자 성장하며 자유롭게 자신만의 의미와 목적, 존재가치를 정해 간다(본질). 장 폴 사르트르의 말을 빌리자면, 인간은 실존적 존재인 것이다.  인간은 환경에 순응해 살아가는 존재가 아닌 자유의지를 통해 스스로의 인생을 만들어가는 존재이다. 실존이 본질에 앞서는 것이다. 사르트르는 이를 '인간은 스스로 존재의미를 만들어 나가는 창조적 존재'라고 묘사한다. 


'인간은 자유의지로 자유롭게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 나간다.' 듣기에는 꽤나 멋져 보이는 말이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장 폴 사르트르는 실존은 두려움과 불안에 휩싸일 수밖에 없다고 설명한다. 정해진 운명이 아닌 미지의 미래를 스스로 개척해야 하기 때문에 자신의 선택이 어떠한 결과를 초래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 모두가 불안감과 함께 살아가는 이유이다. 또한 누군가를 탓할 수도 없다. 자신의 결정은 자신의 판단과 의사로 결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책임 또한 본인이 스스로 져야 한다.


이러한 자유의지의 부담감은 우리를 늘 짓누른다. 누군가는 이러한 부담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스스로 자유를 포기한다. 스스로를 능동적인 존재가 아닌 수동적인 존재로 여기며 운명을 탓하고, 부모를 탓하고, 주변 사람을 탓하고, 환경을 탓한다.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를 포기하고 그저 정해진 대로 살기 시작하며 대신 이 모든 것이 외적인 요소 때문이라고 탓한다. 사르트르는 이러한 행동을 자기기만이라고 정의하며 동시에 비열한 행동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면 우리 모두 자기기만을 저지르고 있지는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볼 수 있다. 우리 모두 전통, 사회규범, 종교, 문화, 법 등에 자신의 행동과 선택에 한계를 짓는다. 다른 말로는 기준을 삼는다고도 할 수 있다. 100% 자신의 자유의지로 모든 선택을 자유롭게 선택하는 것은 너무나 불안하고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이 잘못되었다고 무턱대고 비난할 수 없지만, 자신에게 제한을 가하는 그 기준에 어떠한 의문도 품지 않고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은 명백한 자기기만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옛날 미국에는 우생학을 토대로 한 법률이 제정되었다. 이름하여 단종법인데 간단히 설명하면 장애가 있는 사람을 강제로 불임시술을 해버리는 법이다. 지금 들으면 다들 이게 말이 되나? 생각하지만 불과 100년도 안된 20세기 초에 미국에서 실제로 시행된 법이다. 더욱 무서운 점은 당시 일반 시민들은 이러한 법에 아무런 항의도 시위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저 정해진 법률에 따라 맹목적으로 산 것이다. 만일 누군가 자유의지를 통해 이에 대해 반발을 했다면 그는 사회적으로 적대적인 존재로 인식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에 대한 책임 역시 자유의지를 사용한 본인에게 있을 것이다. 

진격의 거인 3기 22화

이렇듯 우리는 모두 전통, 사회규범, 종교, 문화, 법이라는 벽을 세우고 그 안에서 정해진 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마치 본질적 존재인 물건이나 가축처럼 말이다. 이쯤 되면 다들 이제 어느 정도 눈치를 챘을 것이다. 왜 진격의 거인이 실존주의 철학에 영향을 받은 작품인지 말이다.


진격의 거인의 주인공인 에렌 예거는 거대한 벽에 둘러싸여 있음에도 아무런 신경도 안 쓰고 그저 주어진 대로 살아가는 벽 안의 인간들이 마치 가축과 같다고 생각한다. 그 벽이 바로 우리의 자유의지를 막는 전통, 사회규범, 종교, 문화, 법 등을 의미한다. 또한 벽 밖에서 계속해서 몰려오는 거인들은 우리가 자유의지를 사용하여 벽 밖으로 나갔을 때 대면하게 되는 여러 가지 부작용을 의미한다. 위의 예시로 들면, 대중의 의견, 시대의 흐름 등에 반발했을 시 당할 수 있는 적대적인 반응과 사회적 매장 등이 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에 무참히 당하고 더욱 벽 밖으로 나오지 않게 되는 이유가 된다.


진격의 거인 3기 마지막 화에서 주인공 에렌 예거와 조사병단은 드디어 벽 밖으로 나와 처음으로 바다를 마주한다. 다들 처음으로 만끽하는 자유에 기뻐하고 있을 때 이 바다 건너 있을 존재(마레 제국 와 다가오는 더욱 거대한 전쟁 등)를 미리 알고 있는 에렌 예거만이 기쁨을 즐기지 못한다. 자유의지 그 뒤편에 있는 자유에 대한 책임과 불안감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사르트르가 말했듯 '인간은 자유라는 형벌을 받는다'.


진격의 거인 4기에서 에렌 예거가 자신이 미래에서 죽일 아이를 불량배로부터 구해주는 장면이 나온다. 미래를 알고 있는 에렌 예거는 자신이 언젠가 이 아이를 죽일 운명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곤 지금 구해주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싶어 그냥 지나가려고 한다. 만약 여기서 그냥 지나갔다면 그것은 자기기만일 것이다. 정해진 운명을 탓하며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자유의지를 포기해 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에렌 예거는 자기기만을 하지 않고 자유의지를 통해 아이를 구해낸다.


진격의 거인의 재미있는 점은 실존주의를 표방하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운명론을 차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에렌 예거는 이미 정해진 미래를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스스로 자유를 찾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캐릭터이다. 이는 비록 운명이 정해져 있다 하더라도 개인의 자유의지는 중요하다는 유신론적 실존주의를 차용했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필자는 개인적으로 작가가 '본질과 실존은 동시에 존재하지만 실존적 의미를 찾는 과정이 가장 이상적인 인생이다'라는 철학을 전하고 싶었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한다.

진격의 거인 4기 3 쿨

인간에게 본질은 없다고 주장하는 장 폴 사르트르와 달리 진격의 거인은 본질 그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다. 일단 에렌 예거부터가 정해진 미래를 알고 있다. 또한 지크 예거는 자신의 DNA를 후대로 전달하는 '증식'이 인간의 본질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곧이어 아르민이 자신은 친구들과 함께 뛰어다니는 것이 그저 즐거웠다며 마치 이것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했다고 말한다. 지크 예거도 쿠사바와 함께 캐치볼을 할 때 같은 기분을 느꼈다며 실존적 의미를 부정하지 않았다.


인간은 완전한 본질적 존재도, 완전한 실존적 존재도 아닐 수도 있다. 본질을 가지고 태어나, 정해진 운명에서 최후를 맞이하게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과정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 행동, 즉 실존적 의미를 찾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그 실존적 의미가 자유의지 뒤편에 숨어있는 선택의 책임과 불안감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는 버팀목이 되어주는 것이다. 에렌 예거는 정해진 운명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매 순간 자유의지로 한 걸음씩 미래로 나아간다. 말 그대로 진격의 거인인 것이다. 


위 해석은 개인적인 견해와 해석이며 실제 작가가 의도했던 해석과 다를 수 있습니다.

작품 속 숨겨진 철학이 궁금한 자신의 최애 작품을 댓글에 써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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