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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이치영 Mar 07. 2024

소원은 이미 이루어졌다.

70대 부모님과 산티아고 걷기 01

 2022년 05월 10일: 파리 -> 루르드

 부모님과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다고 생각했을 때 시차 적응도 할 겸 루르드를 코스에 넣었다. 부모님과 여행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집안이 천주교라면 거의 100% 루르드에 들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루르드에서 침수욕(?)을 하면 아픈 곳이 낫는다는 전설이 들려오기도 했다. 엄마는 무릎 관절 수술을 하셨고 아빠는 협심증이 있고 폐 기능이 약하다. 이는 엄마는 오래 걷는 것 자체가 큰 문제이고 아빠는 오르막이 큰 문제라는 점을 시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길에 올랐으니 한 번쯤 하느님의 기적을 바라는 마음도 있었다.

 아침 일찍 가벼운 호텔 조식을 챙겨 먹고 떼제베를 타러 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열차가 35분 연착이란다. 그렇다. 5월의 프랑스는 파업의 달이다. 4년 전 5월에도 열차 파업에 관한 이슈가 있었다. 그렇지만 그땐 운이 좋았다. 몽파르나스에서 탄 것도 한몫한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하루에 한 번 있는 공항에서 루르드로 가는 열차이다. 이게 연착이라니... 첫날부터 첫 단추부터 잘못 꿰매진 느낌이다. 난 이 35분 동안 지갑을 잃어버린 줄 알고 엄청 놀랐고 아빠의 화장실 문제도 해결해야 했으며 열차 운행에 관련한 문제를 알아봐야 했다. 혼자였다면 어떻게든 되겠지란 마음을 가질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내가 책임져야 할 부모님이 있었다. 그리고 나도 잘 모르는 프랑스라는 나라에 와있었다. 인포메이션에 문의 한 끝에 열차를 타긴 탔지만 이게 끝이 아니었다.

<여행 시작도 전에 지쳐버린 부모님, 그래도 창 밖 풍경을 찍을 정신은 있었나보다. 딱 한 장 건진 사진>

 원래 공항에서 루르드까지는 열차를 1번 갈아타는 것이었다. 그런데 연착으로 인해 다음 기차를 놓친 것인지 열차를 3번이나 갈아타야 했다. 파리 공항 -> 경유지 -> 루르드였는데, 파리 공항 -> 알지 못한 경유지 (이곳에서 다른 티켓 3개를 나눠주었다.) -> DAX -> PAU -> 루르드 도착이었다. 도착 예정 시간도 훨씬 늦어졌음을 말할 것도 없다. 열차 사이 간격이 무척 짧은 곳도 있어서 정말이지 사진이고 뭐고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나는 그저 플랫폼 찾기에만 혈안이 됐다. 빠르게 걷는 나를 쫓아오느라 부모님도 정신없으셨을 것이다. 혼자 왔더라면 '그래, 이것도 경험이지.'라고 생각할만한 것들이 부모님과 같이 오니 무언가 하나라도 틀어지면 안 된다는 생각에 힘들어진다.

 그래도 무사히 루르드 역에 도착했다. 밖에 줄 서 있던 택시를 잡아타고 예약한 호텔에 도착했다. 숙소는 HOTEL ALBA로 엄청난 서치 끝에 찾아낸 곳이었다. 어제 묵었던 공항 옆 호텔보단 방도 넓고 맘에 들어서 지금까지 긴장했던 마음이 조금은 풀어졌다.

<숙소 창밖 풍경>

 생각보단 맛은 없던 저녁을 먹고 밤 9시에 열린다는 촛불봉헌 미사를 드리러 나갔다. 호텔 로비에서 초를 사고 줄지어 걷는 사람들을 따라가니 큰 성당이 나왔다. 사람들이 손에 든 초에 서로 불을 붙여주고 미사가 시작됐다. 광장 안에 그룹 별로(?) 사람들이 서 있는데 성모 마리아 상을 따라 크게 광장을 한 바퀴 돌았다.

<들어가자마자 만나는 성모마리아 상과 엄청 큰 성당 앞 광장>

광장을 한 바퀴 돌고 나니 미사가 시작되었다. 나는 4년 만에, 코로나로 성당을 잠시 못 나간 부모님은 대략 2년 만에 드리는 미사였다. 프랑스어로 진행되는 걸 보니 느낌이 색달랐다. 성지이자 관광지가 된 이곳, 루르드. 굉장하다는 말 밖에 나오지 않았다.

 수많은 사람들의 기도를 보고 있자니 새삼 경이로웠다. 이들 중엔 기적이 일어나는 사람도 있지 않을까? 나 역시 4년 전 길 위에서 꿈꿨던 부모님과 함께 순례길을 오르길 기도했는데, 그 기도에 응답받아 지금 이 자리에 부모님과 함께 있다니... 감격스러웠다. 이번엔 무사히 길을 걸을 수 있기를 기도했다.

 마음은 이미 저 멀리 가있는데 몸은 아직 이곳에 도착하지 못한 느낌이었다. 시차 때문이기도 하고 아직은 몸이 마음의 속도를 따라가려 노력 중이리라. 잠시 이 작디작은 성지에서 마음과 몸의 속도를 맞춰 갈 수 있기를 바라며 아직 끝나지 않은 미사를 뒤로 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시작이 반이라고 순례길 여정을 시작했으니, 이 여정이 무탈하기를... 날씨도 계속 좋기를 바라고 힘들지 않기를 바라지만 내 맘대로 되지 않는 것에 너무 마음 쓰지 말기를... 이미 부모님과 이 길 위에 있는 것 자체가 내 소원이 이루어진 것이니 하루하루를 행복하게 지낼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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