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도 편집자가 할 일이다
저자가 13명인 책을 기획해서 원고를 받았는데 글이 천차만별이었다.
기본적인 오탈자 체크도 되어 있지 않고, A4 10장을 쓰면서 문단 나누기도 하지 않고, 결론도 없었다.
물론 게 중에 빛을 발하는 잘 쓴 글도 몇 개 보였다.
하지만 심각하게 별로인 글을 만났다.
글쓴이의 나이가 몇 인지는 모르겠으나 스스로를 필자라 지칭하며 꼰대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주제가 뭔지도 모르겠고, 비문도 많고, 중언부언 저자 자신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쓴 건지 궁금했다.
그래서 저자 목록에서 뺐다.
저자에게는 카톡으로 이유를 설명하고 다음을 기약하자고 했다.
수정하면 안 되냐고 계속 물어보던데, 보통 이럴 경우 그 틀 안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안 된다고 죄송하다고 하고 대화를 끝냈다.
퇴근하고 집에서 쉬고 있는데 저자들의 대표 격인 운영자로부터 연락이 왔다.
그 사람 글을 왜 뺐냐고.
그래서 설명을 해주었다.
그랬더니 수정하면 되지 않냐는 똑같은 말을 하길래 나도 똑같이 대답했다.
글을 보여달란다.
자기들이 결정하겠다고 한다.
순간 화나서 다툼이 시작되었다.
결국 결론은 나는 저자들과 직접 연락하지 말고 운영자를 통해서만 연락하라는 것.
황당했다.
편집자로서 무시당하는 것 같아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전화를 끊고 끓어오르는 화를 누르기 힘들었다.
다음날 회사에 보고했더니 일단 기다리라고 한다.
나는 그 원고에 대한 애정이 식었다.
편집을 하고 출간을 하면 내 새끼를 세상에 내보내는 것과 같은 느낌이다.
그런데 애정이 식었는데 얘를 어떻게 이뻐해 줄까.
일요일 화상회의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월요일에 장문의 이메일을 보냈다.
답장에는 내가 빼고자 했던 저자를 포함하여 목차 구성을 다시 할 것이라고 한다.
대치 상황은 계속되었다.
카톡으로 기나긴 답장을 했다.
네 마음대로 해라, 나는 너네 글에 손도 안 댈 테니까, 알아서들 하시라고.
자고 일어나니 답장이 왔더라.
작가의 권리를 무시하는 것 아니냐고 한다.
작가의 권리?
지금 그 운영자의 태도는 월권 아닌가?
출근하면서 카톡을 곱씹어 보았다.
그리고 메일을 열었다.
요청했던 전체 원고를 첨부하면서 긴 글을 썼다.
요지는 이거다.
출간하는 책들은 내 자식과 같다.
탈고 이전의 일들에 대해서는 너네 알아서 하고,
탈고된 이후 원고가 입수되면 그때부터는 내 일이다.
나는 내 자식을 거지꼴로 내보낼 수 없으니 어쨌든 최선을 다하겠다.
전화 통화하면서 결례를 범한 것은 사과한다.
그리고 저자와 직접 소통하게 해 달라.
새해 복 많이 받으시라.
납작 엎드려 사과한 꼴이었다.
어쩔 수 없었다.
내가 버티면 결국 회사가 손해를 입으니 먼저 미안하다고 해야지.
이를 악물고 메일을 썼다.
아침에 보낸 메일의 답장은 아직이다.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한다.
원고 입수되는 순간부터는 편집자로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을 할 것이다.
사과는 했지만 거의 다 먹고 심지만 남은 사과를 했다.
안타깝게도 이번 책은 애초의 기획의도에서 한참 벗어났고 저자들이 글을 못 썼다.
무지막지한 노동을 필요로 하는 작업이 될 것이다.
원고를 몽땅 가져가셨으니 얼마나 수정해서 탈고할 건지 두고 볼 거다.
그냥 나는 아직도 화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