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내가 이런 생각도 한다고?

by 뚜비뚜밥

사귀기로 하고 나서 남자친구가 물었다.

다음 주말에 일정 있냐고, 첫 데이트에 하고 싶은 거 있냐고.


몇 달 전 나는 이럴 줄은 꿈에도 모른 채,

고등학교 때 친구가 사는 강원도로 집들이를 가기로 해두었다는 걸 깨달았다.


디지털 노마드를 꿈꾸며 서핑을 사랑하는 친구가 개발자로 전향한지 어느덧 3년,

이제 서울에 살 필요가 없다며 미련 없이 떠난 그녀.

나는 그녀의 새 출발을 응원해주고 싶었다.


말이 집들이지,

각자의 피치 못할 사정으로 몇 번이나 미뤄진 터라

이번에는 더 미루고 싶지 않았다.


금요일에 퇴근하고 바로 기차를 탈 예정이라

이번 주말은 못 볼 것 같다고 하자

아쉬움 가득한 얼굴.


하지만 이내 괜찮다며

다음 주말에 두 배로 재밌게 놀자며

잘 다녀오라는 스윗한 그였다.



금요일 저녁,

KTX를 타고 무사히 도착했다.

마중나온 친구와 반가운 상봉을 하였고,

우리는 새벽까지 이런저런 사는 얘기를 하다 잠들었다.


토요일 아침,

나는 처음으로 강원도에서 서핑을 했다.


제주에 비해 수온이 낮아서 걱정했지만

막상 해보니 친구 말대로 시원한 게 아주 딱 좋았다.


혼자가 아니라서 그런 걸까,

서핑 고수와 함께라 그런 걸까,

아니면 내가 좋아하는 친구랑 함께여서 그런 걸까.


물에 빠지고 빠져도 그저 깔깔 거리기 바빴고

말 그대로 그저 좋았다.


그러다 가끔,

아주 가끔 파도를 탈 때의 그 짜릿함!

온 몸에 도파민이 돈다는 게 바로 이런 거겠지?




배가 슬슬 고파와서 물밖으로 나왔다.


맛있는 물회를 먹으며 신나게 웃고 떠들고 있을 무렵, 갑자기 친구의 휴대폰이 울리는 것이었다.

“네, 알겠습니다. 확인해보겠습니다.”

친구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친구가 프리랜서로 하고 있는 프로젝트에 문제가 생긴 모양이다. IT 문외한인 나는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심각하다는 건 말 안 해도 알겠었다. 얼른 집으로 향했고, 친구는 남은 저녁 시간을 내내 쏟았지만 쉽게 해결되지 않는 듯했다.


친구가 어렵사리 입을 뗐다.


“여기까지 와줬는데, 너무너무 미안한데 내일 일을 해야 할 것 같아. 최대한 빨리 해결하고 싶은데 생각보다 오래 걸릴 것 같네. 너 혼자 여행하는 것 좋아하니까 차라리 나 기다리지 말고 혼자 돌아다닐래? 정말 미안해. 어떡하지?”


이 속깊은 친구가 이렇게 말을 꺼낸다는 건

정말 어렵다는 얘기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신경쓰지 말라고 했다.

산을 가든, 호수를 가든, 서핑을 하든, 아니면 카페를 가든. 혼자서도 잘 노는 나니까.

친구의 일이 얼른, 잘 해결되기를 바랄 뿐이었다.


친구가 편히 집중할 수 있도록

집 근처 해변 산책을 하며 남자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슬픈 소식을 남자친구에게 전했더니,

남자친구는 거기까지 갔는데 어떡하냐며 나보다 더 아쉬워한다.

그러다 갑자기 특유의 나긋나긋한 목소리에 생기가 돌더니 이렇게 말한다.

“내일 강원도로 픽업하러 갈까?“


쿵.


내 심장이 내려앉는 소리.


생각지 못한 전개에, 내 입꼬리와 광대는 이미 저 끝까지 올라가 있다.


“정말? 나야 너무 좋지!”


그는 알겠다고 그럼 지금 빨리 자고 내일 새벽에 출발할 때 연락하겠다며 끊는다.


수면 시간을 중시하는 스윗한 T같으니..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문득,

서울이랑 가깝나? 해서 지도를 찾아보니니 꽤 오래 걸리는데 이미 자는 사람 깨울 수도 없고,

그냥 카톡을 남겨뒀다.


나는 와주면 너무 고맙지만,

월요일에 출근해야 하는데

혹시 아침에 피곤하면 그냥 쉬어도 괜찮다고

어차피 예약해둔 기차도 아직 취소하지 않았으니

정말로 무리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카카오톡을 몇 번이나 열어봤지만

1은 사라지지 않았다.


컴퓨터와 씨름하는 친구에게

내일 남자친구가 올 수도 있다고,

오면 아침에 나갈 것 같다고

네가 늦게 잠들면 나는 조용히 나가겠다고 말하며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내가 눈을 떠보니 8시.

‘지금 출발해. 운전하는 동안 카톡 못 볼 수도 있으니 연락 필요하면 전화줘.’라는 짧지만 다정한 카톡이 와 있다.


그의 예상시간에 따르면,

1시간 30분 정도 후면 도착할 듯.


친구는 곤히 잠들어 있고,

친구가 내 침대맡에 포스트잇에 글을 써놨다.

‘나 새벽 5시라 이제 잘려고 하는데 너무 늦게 잠들어서 못 일어날 수도 있을 것 같아. 인사하게 나갈 때 꼭 깨워줘!’라고.


일단 조용히 서둘러 준비를 하고,

자는 친구를 차마 깨울 수 없어서 쪽지를 남기고 짐을 챙겨 나왔다.


어제 그 해변을 걸으며,

남자친구에게 여기로 와달라고 했다.

안 그래도 그 주변이라는 그!


설렜다.

어제 여기 걸을 때만 해도,

언젠가 그와 함께 여기를 함께 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그 언젠가가 오늘이 될 줄은 정말 몰랐다.


그와 함께가 아니라면 멀리 있을 행복이

그와 함께라면 오늘로 성큼 다가올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몇 시간을 운전해온 그.

예상 시간보다 조금 일찍 왔길래 차가 별로 없었냐고 물으니,

나를 빨리 만나고 싶어서 휴게소도 들르지 않고 단숨에 왔다고 한다.


굳이 이렇게 말 안 해도 이미 감동인데,

이렇게 말해주니 더 감동이잖아!


배가 고플 그를 위해

나는 맛있는 브런치 식당을 찾아두었다.

우리는 푸른 바다를 보며

어제 이 시간까지만 해도 전혀 예상치 못한

첫 주말 브런치를 함께 했다.


이런 게 행복인가,

이래서 사람들이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하나 싶고,


내가 어딜 가더라도 와줄 것 같은,

듬직한 이 느낌에,


인생에서 처음으로

짝꿍을 만나면 이런 느낌인가?

기다리고 기다리던 내 반쪽이 이 사람인가?

하는 생각으로 내 마음이 몽글몽글해졌다.


그러다가도,

‘아, 이걸 내가 당연시하면 안되는데’,

내가 남자친구의 이러한 배려와 애정을 당연하게 여기게 될까봐 두려워하다가도,


‘너무 걱정하지말고 그냥 지금 이 순간을 즐기자’,

하며

오만 생각이 온 마음을 뒤덮었다.



서울로 향하기 전,

남자친구가 강원도 특산물을 사고 싶어하기에

특산물을 좋아하냐고 물었더니

부모님이 좋아하신다 한다.


나도 같이 네이버를 열심히 검색했고,

결국 마음에 드는 곳을 찾아서 두 손 가득 샀다.


이렇게 가족을 생각하는 사람이면

가정을 꾸리면 얼마나 가정을 위할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어랏?

내가 이런 생각을 한다고?


가정을 꾸려볼 생각을 안 해본 나에게

이건 꽤나 신선한 충격이었다.


예정에도 없이 강원도까지 와놓고,

힘든 내색도 안 하고,

그냥 보고 싶었다고 하는 사람.


담백한 사람.


이대로면

내가 진짜로 결혼하고 싶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든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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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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