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가상의 적
몇 년 전 인터넷을 달구던 조롱의 단어가 하나 있다. 바로 “앱등이”다. 어원은 나름 단순하고 직관적이다. 애플(Apple) 사(社)의 앞글자(AP)를 따서 “앱”, 당시 바퀴벌레보다 공포의 대상이었던 해충 꼽등이에서 “등이”를 따 만들어진 별명이다. 처음에는 그저 애플 사 제품의 특징도 모르면서 무작정 추종하는 무리를 조롱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앱등이”라 호칭하는 범위가 점점 넓어지더니, 끝물에는 애플 사 제품을 쓰는 이들을 아울러 부르는 말로 변질됐다. 이는 작은 전쟁의 시작이었다. 결국 “앱등이”라 지칭당한 누리꾼들이 억울함을 토로하기 시작했고, 그들의 표적은 당연하다는 듯 삼성 스마트폰을 쓰는 이들이 되었다. 이후 자그마치 수개월 동안 온갖 멸칭들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이제는 잠잠해졌지만, 그 작은 전쟁에 승자는 둘뿐이었다. 누구였을까? 승자는 바로 삼성과 애플, 그 둘이었다.
[“앱등이”라는 별명은 이제 몇 년 전의 과거가 되었다.]
의문이 생길 수도 있다. “앱등이”라는 별명으로 애플 사는 이미지에 상처를 입었을 테고, 이는 삼성도 다르지 않다. 말하자면 아무 짓도 안 했는데 억울하게 체신만 상한 꼴이다. 그러나 조금 더 생각해보자. 삼성 팬들에겐 애플이라는 적이 생긴 셈이고, 애플 팬들에겐 삼성이라는 적이 생긴 셈이다. 자고로 결속력을 강하게 하는 데는 공통의 적만큼 확실한 것이 없다. 몇 개월 동안 그토록 싸우던 사람들은 장난이었더라도, 이제 삼성 팬이 애플의 아이폰으로 갈아탄다든가 하는 일은 상상하기 힘들어졌다. 고객의 충성도가 질적으로 달라진 것이다. 그러므로 그 작은 전쟁에서 무시 못 할 성과를 얻은 건 삼성과 애플뿐이다. 고객의 마음이 가을 하늘처럼 천변만화하는 이때, 충성도 높은 고객을 얻는다는 건 소중한 가치를 지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적”의 존재가 오히려 복이 된 셈이다.
사실 삼성과 애플의 예는 규모가 지나치게 큰 예다. 이재용과 팀 쿡이 이 글을 읽고 있으리란 생각은 하지 않는다. 다만 규모는 작아도 적을 만드는 건 비슷한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그렇다면 적은 어디에 있을까. 적은 어디에나 있다! 없더라도 만들면 그만이다. 세상에 악당은 많고, 고객이 싫어할 만한 사람은 더 많다. 그중 하나만 짚을 수 있다면 고객의 호감을 사는 데 큰 지장이 없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당신이 부동산 중개업자라고 하고, 고객이 눈앞에 있는데 당신이 적으로 삼을 만한 대상은 누가 있을까. 고객이 싫어할 만한 사람은 시시콜콜한 신변잡기를 듣지 않아도 뻔하다. 만약 고객이 임대인이라면 터무니없이 세입자의 편만 들어주는 부동산 중개업자 이야기를 하면 된다. 만약 고객이 세입자라면? 반대로 임대인의 편만 들어주는 중개업자 이야기만 하면 된다. 그래도 싫다면 공인중개사 자격증도 없이 영업하는 비양심적인 중개업자 이야기를 하면 된다. 이처럼 고객과 함께 욕할 대상은 많다. 굳이 실존하는 인물을 특정해서 말할 필요도 없이 비양심적인 “누군가”는 고객에게 분노의 감정을 불러일으키기 쉽다.
[적의 적은 나의 친구라는 말이 있듯이, “가상의 적”은 동료의식을 느끼게끔 한다.]
동료의식은 고객에게 신뢰감과 함께 무언가를 해주고 싶다는 의무감이 들게 한다. 따라서 마케팅에서 “가상의 적”을 만드는 건 꽤 유용한 수단이 될 수 있다. 광고 문구에도 “낡은 것”에 대한 적대심을 암시하는 표현이 많이 쓰인다. “이제껏, 후라이팬에 익혀 기름이 뚝뚝 떨어지는 피자를 제맛이라고 드셨습니까? 그렇다면 피자 헛먹으셨습니다.”라는 표현 등이 그 예다. 과거 미스터피자 신문 광고에 실린 단어인데, “후라이팬에 익혀 기름이 뚝뚝 떨어지는 피자”라는 표현이 가상의 적으로 암시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가상의 적 만들기”는 마케팅에서 두루 쓰이는 기법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하지만, 세상에 악당은 많다. 오늘부터 신문을 볼 때 사회면을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자. 평소라면 혀를 끌끌 차고 말았을 악덕 업주들은 당연히 고객들도 싫어한다. 그들을 적으로, 고객을 아군으로 만드는 것이야말로 마케팅의 기초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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