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신문 한 장 주세요.”
눈 덮힌 철로가 내다보이는 K역 대합실. 한 남자가 신문가판대 구멍 속으로 구겨진 천 원짜리 한 장을 퉁명스레 떨궈놓았다. 밖에서 안을 들여다 볼 수 없게 날짜 지난 주간지들로 사방을 도배해 막은 답답한 가판대의 구멍 속에서 마디가 굵고 주름진 여자의 손이 불쑥 나오더니 신문 한 장과 잔돈을 내놓았다.
남자는 눈살을 찌푸렸다. 자동판매기처럼 돈을 챙기고 신문을 내주는 그 구멍이 지지리도 맛도 없던 국이 담긴 식판이 수없이 오가던 밥구멍을 연상케 했다. 12년 동안 매일같이 나오던 똥국이었다. 남자는 대합실 벤치에 앉아 신문을 폈다. 정치면 경제면 기사면. 아는 내용이 별로 없었다. 그동안 대통령도 여러 번 바뀌어서 지금이 몇 번째인지조차 헷갈렸다. 예전 같으면 선데이 서울에서나 보던 누드에 가까운 야시러운 사진들이 신문 한 면에 아무렇지도 않게 실려 있었다. 남자는 왼손에 거머쥔 두부를 우쩍 한입 베어 물었다. 물기가 얼어서 서걱 서걱 얼음이 씹혔다.
“시펄..맛도 억수로 없네. 콩밥 존나게 먹고 나와서 뭐가 좋다꼬 또 콩두부를 쳐먹노”
남자는 반너머 남은 두부를 쓰레기통에 던지고 대합실 시계를 보았다. 4시 55분. 계절에 맞지 않는 얇은 코트를 뒤져 열차표를 꺼내어본다. 열차도착시간은 4시 58분이었다. 남자는 읽던 신문을 거칠게 개켜서 옆자리에 치워놓았다. 벌써 서너 장의 종류가 다른 신문들이 수북이 쌓여있었다.
“문디가스나..올 리가 없제. 이 등씨야..니 같으면 전과자새끼가 뭐가 좋다고 오겠노.”
남자는 혼잣말을 씨부리며 왼손에 낀 반지를 어루만졌다. 조잡한 가짜 에메랄드가 박힌 은반지였다. 열차가 도착하고 있다는 안내방송이 들려왔다. 남자는 다시 시계를 본다. 어디에선가 잘 살고 있으리라. 얼굴이 반반한 가스나였으니까 어디 가서 굶어죽진 않았으리라. 남자는 괜히 애꿎은 대합실문을 구두발로 걷어찼다.
퍽!
허억..허억..허억..
남자가 거친 숨을 토해내었다. 새벽 1시. 방적공장 뒷켠 자재창고 벽에 가로등을 등진 남자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괴기스럽게 늘어진 남자의 그림자는 한손에 커다란 벽돌을 들고 있었다. 벽돌에서 피가 뚝 뚝 떨어졌다. 남자의 발밑에는 곤색 잠바를 입은 사내가 뒷통수에서 피와 뇌수를 쏟으며 쓰러져 있었다. 사내의 바지춤은 맨살이 앙상한 허벅지까지 내려와 있었다.
“허억..허억..유..윤미야..이..이..새끼 트..틀렸다. 주..죽었다.”
툭. 남자가 벽돌을 떨구었다. 손이며 다리며 사정없이 후들거렸다.
“오..오빠.. 어서 도망가 이 새낀 내..내가 죽였다고 할게. 경찰 오기 전에 어서 도망가.”
윤미가 단추가 튿어진 하늘색 작업복을 황급히 여미며 드러난 앞가슴을 틀어막았다. 성물(聖物)처럼 남자가 매일 밤 소중히 아끼고 사랑해 주던 뽀얗고 따뜻한 가슴이었다. 하루 종일 짐을 나르는 남자의 고단한 하루 일을 잊게 해주는 사랑스러운 것이었다. 작업반장 따위 속물이 더러운 손으로 함부로 주무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우..웃기지 마라..가..가스나야..니..닌 평생 내가 책임진다고 안했나..똑. 똑. 히. 들어라. 난 이 새끼가 잔소리하고 지랄거리는 게 평소부터 맘에 안 들었다. 그래서 밤에 몰래 불러내서 말 좀 하려다가 홧김에 고마 칵 직이삔기다. 닌 어서 들어가 자는 척 해라. 걱정마라. 나 도망 안 간다. 자수하면 몇 년 안 산다 아이가.”
“아냐 오빠 내가 사실대로 말할게. 이 새끼가 나 덥치려고 한거 오빠가 구해줬다고 내가 다 말할게”
“니 미친나? 내가 때릴때 니가 이새끼 잡고 있던 것도 다 말할래? 같이 콩밥 묵을까? 둘 다 깜방가서 눈썹털 하얘질때까지 썩다나오까?”
“....하지만..하지만..”
남자가 바지춤을 뒤져 지저분한 안경수건에 둘둘 말린 무언가를 꺼내었다. 가짜 에메랄드가 박힌 싸구려 은반지였다. 남자는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집어 여자 손가락에 끼워주었다.
“전부터 주고 싶었는데 돈 더 벌어서 더 존 거 해줄려꼬 그리 몬했다. 일단 이거라도 끼고 있어라. 가스나가 손가락이 휑하니까 사내자식들이 자꾸 찝적대는거 아이가. 내는 이래도 마, 우리 친척형은 서울대 법대 다닌다 아이가. 조금만 고생하면 나올끼다. 그때 제대로 된 금반지 끼고 결혼하자. 기다려줄 수 있제? 그리 할 수 있제?”
“으으윽..으응..기다릴게 십년이든 이십년이든..으윽..나..기다릴게..오빠 나오는 날 내가 제일 먼저 반겨줄게..우욱..”
여자는 터져 나오는 울음을 주먹으로 틀어막았다.
“내사 괘안타..마..조금만 참아라 조금만..”
남자가 여자를 보듬어 안았다. 조금은 아닐 거라는 걸 남자도 알고 있었다. 남자의 등에 놓인 여자의 작은 손에서 반지가 별빛을 머금고 눈물처럼 반짝였다.
삐걱.
낡은 대합실문을 열자 강 비린내가 섞인 바람이 씨잉 코끝을 쏘고 지나갔다. 남자는 몇 번이나 대합실 쪽을 돌아보다가 열차에 발을 올려놓았다. 덜커덩 덜커덩. 게으른 짐승처럼 열차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제 어디로 갈꺼나. 어딜가야 반지도 잊고 똥국도 잊고 그저 그렇게 살 수 있을꺼나.
“아줌마! 제 말 안 들리세요? 여기 신문 한 장 달라구요!”
안경 쓴 사내가 대합실 가판대를 퉁퉁 두드리며 재촉했다.
“죄..죄송합니다.”
가판대 구멍으로 마디가 굵고 거친 여자의 손 불쑥 나와서 신문 한 장과 잔돈을 내주었다.
여자의 손에는 가짜 에메랄드가 박힌 싸구려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빛바랜 보석 위로 툭. 굵은 눈물이 한 방울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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