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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피 Jan 21. 2023

2. 나 이제 그런 사람 아니에요.

나를 잃다


어느 저녁에 난데없이 함께 졸업한 선배들이 있는 술자리에 불려 갔다. 예상치 못한 모임이었다. 누구 경조사에서 마주치지 않고서야 사적으로 본 적이 없었던 선배였다. 아버지 상을 치를 때 와준 선배였고 사실은 그 이후 몇 년 만에 처음 만난 거였다. 우울함에 한동안 먼저 사람을 만나지 않고 피했던 주제에 친하지도 않은 사람이 먼저 찾아준 것이 또 내심 기뻐서 연락을 받자마자 행선지를 바꿨다. 그런데 도착했을 때는 이미 다들 만취 상태라 어이가 없었다. 게다가 갑자기 내 손을 마주 잡고는 보고 싶었노라고, 너 웃는 얼굴 보니 좋다고 반복해서 얘기했다. 학교 다닐 때 너 진짜 좋은 애였다고, 내가 성공해서 너 맛있는 거 사주고 싶다고,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연락하라고, 십 수 번을 만취 상태로 얘기하는데 나는 힘껏 입꼬리를 올려 웃음으로 답했다. 사실은 좀 당황했고 고맙기도 하고 마음이 번잡해 말문이 막혔는데, 그의 반가운 얼굴과 마음과 손길을 마주 상태에서 그저 미소 지을 뿐이었다. 모든 학생들이 같은 공간에서 서로 고생하고 부대끼고 밤을 새웠던 학창 시절이었지만 그렇다고 사이가 친밀하다고 말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나를 너무 좋게 봐줘서, 좋은 사람으로 기억해 줘서 고마웠다.


분명히 그 마음이 너무나도 고마운데 기쁘기는커녕 속으로는 그 이상으로 서글퍼졌다. 그의 기억 속에 좋은 사람이었던 나는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이가 많아지고 경험치가 쌓이면 더 나은 사람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내게 남은 건 부정하고 싶은 나의 현재와 이렇게 만든 나의 과거를 한껏 원망하고 후회하는 자신이었다. 그의 기억 속에 있던 그때의 내가 너무 그리워져서, 그렇지만 그때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갑자기 쏟아지는 좋은 말들에도 나는 기꺼울 수가 없었다. '맨 오브 라만차'에서 알돈자가 돈키호테에게 고귀한 둘시네아 공주님으로 불릴 때 그 서글픔을 이해할 것 같았다.


당신의 인정이 나의 분노를 뺏고 슬프게 만드는 걸 어째서 몰라요? 천대와 구박은 참을 수 있지만 인정은 참을 수 없어 제발 이젠 고귀한 둘시네아 어쩌고 괴롭히지 말아 줘요. 난 천하고 보잘것없는 여자 알돈자란 말이에요.
<맨 오브 라만차>


맨 오브 라만차에서 돈키호테가 거리의 여자 알돈자에게 자신의 이상적인 숙녀 둘시네아를 이입하고 이 사람을 높이 치켜줄 때 그녀는 반대로 자기가 처한 불행한 현실과 낮은 자존감을 마주한다. 알돈자가 아무리 자신의 처지를 말해도 돈키호테는 현실의 그녀를 부정할 뿐, '고귀한 둘시네아' 따위를 지껄인다.


나는 알돈자처럼 바닥에서 고꾸라진 인생을 사는 기분이 들었다. 만취한 선배들을 차례로 웃으며 집으로 보내놓고 나 홀로 돌아오는 길에 걷잡을 수 없이 목놓아 울었다. 


'나, 이제 선배가 생각하는 그런 사람 아니에요. 지금은 그렇게 됐어.'


속으로 삼킨 말은 눈물이 되어 쏟아졌다. 고귀한 둘시네아처럼 되고 싶다는 생각조차 못한 알돈자처럼 스스로를 깎아내리고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있었다. 나는 이미 사회에서 내팽개쳐졌다는 생각, 노력할수록 상처받고 더 낮은 바닥으로 꺼져내려가는 삶에서 이 삶의 흐름을 거스를 수 없다는 마음으로 의욕을 잃은 상태였다.


누군가 내 행복을 바라고 응원하는 마음에도 이때의 나는 완전히 꼬여버린 상태였다. 앞을 바라보지 못하고 과거에 매달려 힘든 시절을 겪기 전의 시간을 그리워하면서.

그렇게 자괴감에 무너져버린 후엔 사람을 만날 수가 없었다. 나를 누구에게 내어놓기도 부끄러웠고,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랐다. 그렇게 끊임없는 후회와 불안의 시간들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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