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다'라는 감정에 집중해 본다. 우리는 좋아하는 게 많다고 해도 생각보다 '좋은 기분'을 일상에서 자주 느끼지는 못한다. 언젠가부터 내 하루의 목표는 '오늘도 즐겁게'가 아닌 '오늘은 무사히'가 된 지 오래다. 나를 편안하고 친절하게 대할 수 있는 행위에 집중해 보자는 의미에서 '좋아하는 것'에 대해 써보는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첫번째 필사 도서 <철학자의 걷기 수업>을 적은 수첩
18. 책을 필사하는 시간
바쁘단 핑계로 책을 멀리 해서였을까. 난독증에 걸렸는지 몇 년간 읽고 싶은 책을 잔뜩 수집하듯 모아놓고도 머릿속에 내용이 들어오지 않아 독서를 하지 않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가 불교경전을 필사 중이라는 얘기를 듣고는 나도 따라 필사에 도전해 보기로 했다. 천천히 꼭꼭 씹어 먹으면 소화가 잘 되듯이 독서도 필사로 익혀보리라. 읽으려고 쌓아둔 책들 중 그나마 쉽게 읽히는 <철학자의 걷기 수업>을 필사하기 시작했다.
그때의 나는 매일이 조마조마했고 무사히 하루가 지나가기만을 바라고 있는 굉장히 긴장된 상태였었다. 그때의 나를 지탱해 준 건 필사이지 않았을까. 다행히도 내게 잘 맞았는지 짧은 시간 필사를 했을 뿐인데 항상 긴장된 마음이 그를 통해 숨통이 트이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현장으로 출근하다 갈아탈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 20분 남짓의 시간을 활용했었다. 추운 겨울의 긴 배차시간에 버스정류장 앞에 있는 맥도날드에서 따뜻한 커피 한잔과 해시브라운을 시켜 자리에 앉아 필사를 했다.
천천히 한 글자씩 종이에 적어 내려 가는 글씨가 마음에도 새겨지는 느낌이 든다. 지은이가 산책하는 동네 어귀의 묘사를 써 내려갈 땐 상상력 없는 나도 머릿속에서 풍경을 저절로 떠올리기도 하고, 또 내 마음을 다그치거나 위로하는 글을 적을 때는 눈물도 떨궜다. 때로는 글이 마음으로 잘 들어오지 않는 때도 있었다. 그럴 때는 필사를 해두고 다시 한번 밑줄 치며 읽기도 했고, 글귀에서 꼬리를 문 내 생각들을 노트 한쪽에 적어두기도 했다. 필사의 첫 번째 책을 잘 선택했던 것 같다. 재미가 붙어서 책과 수첩을 항상 갖고 다니면서 틈만 나면 적었다. 카페에서 만나기로 한 친구를 기다리는 동안에, 재활수업 들어가기 전 남는 시간 등을 활용했다. 책 한 권을 짧은 시간의 필사로 소화하려니 시간이 굉장히 오래 걸렸지만 드디어 한 권을 완독 했다는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그 첫 책이 <철학가의 걷기 수업>이었어서 정말 산책명상을 하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책을 필사하기 시작했더니 다시 예전처럼 눈으로만 책을 읽어도 머릿속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래도 여전히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퇴근길 카페에 앉아 필사하는 시간을 갖는다. 요즘엔 한 권을 오롯이 그대로 필사하기보다는 아침 출근길 책에서 마음에 드는 문구를 저장해 두었다가 여유 있는 날의 저녁에 수첩에 옮기는 방식으로 쓰고 있다. 어떤 글인지에 따라서 마음 상태가 다르긴 하지만 필사를 하고 나면 마음이 조금 정화되는 기분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