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커피 로스터 일지
진심으로 커피를 좋아하게 된 이야기
특별히 잘하는 것도 없고, 좋아하는 것도 없었던 나는 반에 한 명은 있을법한 평범한 학생이었다. 당연히(?) 공부는 내려놓은 지 오래였다.
수업시간에 책을 읽을 시간이 생겨서 평소에 가지도 않던 학교 도서관에 우연히 가게 됐었다.
한 시간을 알차게 때울만한 책을 찾던 중, 정말 아무 생각 없이 책을 하나 집어 들었다. 그림이 유독 많이 그려져 있는 커피 책이었다.
난 ADHD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가만히 있는 걸 못하는데, 그날은 자습시간뿐만 아니라 쉬는 시간에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커피 책을 쉬지 않고 읽었다.
그 책은 <주사기로 에스프레소 내리는 레시피> 같은 도전 욕구가 솟아나는 내용들로 가득했다. 궁금한 건 참지 못하는 나에게 그런 내용들은 너무 재밌어 보였다.
주사기로 커피를 만들 수도 있다니!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그전까지 나에게 커피는 달달한 믹스커피와 쓰기만 한 블랙커피 두 가지뿐이었다. 근데 책 속에 커피는 정말 다양했다. 뜨거운 물 붓고 끝! 이 아니라 정~말 많은 도구들을 사용해서 커피를 내릴 수 있었다.
내가 모르는 이야기가 이렇게 많았다니, 그전까지 알지 못했던 내용들을 하나하나 알아가니 끝이 없어 보였다. 그리고 정말이지 따라 해 보라고 만든 레시피들이 나를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나는 그날 이후로 집에서 커피와 본격적으로 투닥거리기 시작했다. 원두를 살 돈이 없어서 집에 있던 인스턴트커피를 가지고 별 짓을 다 했다. 주사기 레시피를 따라 해보기도 하고, 그걸 믹서기에 넣어보기도 하고(이 딴 게 그라인딩?!), 따라 해 볼 법 한건 다 따라 했다.
지금까지 내가 하고 싶어서 했던 건 게임 말고는 없었는데,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내가 무엇인가 찾아서 하고 있는 건 처음이었다. 커피와 투닥거릴 생각에 매일이 기다려졌다. 그리고 파도 파도 끝이 없어 보이는 커피는 그 설렘과 두근거림을 계속 이어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만들어낸 커피들은 참혹했다. 결국엔 커피는 맛이 있어야 하는데 내가 만든 건 커피가 아니었다. 그냥 검은 물이었지. 맛있는 게 뭔지도 모르겠고, 커피가 너무 어렵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번엔 다르겠지 하면서 다시 커피를 갈고, 물을 끓이고, 커피를 내렸다. 하지만 매번 맛이 없어서 실망했다. 그리고 슬슬 화가 나기 시작했다.
맛이 없을 때마다 실망스럽고 좌절감이 느껴지는데, 한 편으로는 계속 왜? 를 생각하고 있었다. 왜 그런 맛이 났는지, 어떻게 하면 맛있게 바꾸는지, 맛있는 커피가 무엇인지 너무 궁금했다.
그 분함이 원동력이 됐다. '다음엔 강해져서 돌아온다...!' 라며 포기하지 않았다. 나름 결과물이 괜찮더라도 더 맛있게 할 수 있지 않을까라며 처음부터 다시 했다. 실패하는 걸 꽤 즐기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게 열심히 커피를 탐구해도 늘 부족함을 느꼈다. 에스프레소 기계를 만져보고 싶고, 스팀우유라는 것도 만들어보고 싶고, 당장 현실적으로 해보지 못하는 것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더 다양하게 피부로 커피를 느껴보고 경험해보고 싶어졌다.
그렇게 당연하게도 바리스타라는 꿈이 생겼다.
하지만 금방 이룰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 꿈은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커피는 지금처럼 취미로 할 수 있다고, 꼭 직업으로 가질 필요는 없다고 반대하는 사람들이 꽤나 많았다.
그때 처음 내 의견은 힘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게 원하지 않는 다른 대학을 갔지만, 그때까지 계속 바리스타에 대한 꿈은 포기하지 않았다.
한 학기를 막 끝냈을 무렵, 군대는 가야 하니 휴학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문득 지금 아니면 카페일을 못해보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고, 입대일자가 밀렸다는 핑계를 대고 휴학을 연장했다.
그렇게 20살 겨울, 처음 카페에서 일을 시작했다.
카페일은 정말이지 상상한 것보다 더 재밌었다. 출근길은 늘 설렜다. 커피를 내리는 것뿐만 아니라, 디저트를 만드는 것도, 심지어 마감 청소를 하는 것까지 재밌었다.
그렇게 즐겁게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지 한 두 달쯤 지났을 때였을까, 지금까지와는 다른 두근거림이 느껴지는 사건이 생긴다.
카페에 자주 오시는 단골손님이 그날도 어김없이 찾아오셨다. 그렇게 여느 때와 다름없이 난 커피를 내어 드렸고, 얼마 후 커피를 다 드신 그 손님은 나에게 빈 컵을 주시면서
"커피 맛있었어요. 잘 먹었습니다."
라고 하셨다. 엄청난 성취감이었다. 정말 사소한 한 마디였지만, '나도 누군가를 기쁘게 할 수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리스타를 하면서 매장이 바쁘면 셀 수 없는 주문에 치이고, 사람들에게 치이면서 포기하고 다른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도 많다.
하지만 내가 내린 커피들이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빈 잔으로 돌아올 때, 그리고 빈 잔을 돌려주시면서 '잘 먹었다'는 그 한마디면 늘 처음 카페 알바를 시작했던 그때로 돌아간다.
지금까지 그 마음이 내가 커피를 계속하고 있는 이유이자, 버티목이다.
매번 커피를 만들면서 머릿속에서는 '제발 맛있어라'를 되뇐다. 사소한 한 마디로 내 인생이 바뀐 것처럼 사소한 나의 커피로 누군가는 큰 행복을 느끼길 바라면서 말이다.
글을 쓰는 지금도 맛있는 커피라는 뜬 구름을 잡기 위해 수 없이 좌절하고 실패하겠지만, 누군가는 내 커피를 마시고 기쁨을 느낄 수 있도록 언제나처럼 커피를 할 것이다.
오늘도 맛있는 커피 한 잔을 만들기 위해 열심히 커피를 볶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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