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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철학하는 CEO Jul 28. 2021

프랑스 화장품 대기업과 일하기_05

고통의 시작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 
저 멀리서 누가 날 부르고 있어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 
우린 앞을 향해서만 나가겠어
주위를 아무리 둘러봐도
내 곁엔 항상 어둠뿐이었어
느낄 수 있는 건 나의 힘든
거친 숨소리 하나일 뿐
무너져 버린 희망
또 후회 속에 난 지내 왔지
하지만 이제 나는
저 알 수 없는 빛을 향해 달려가고 있어

      ... 중략...


나는 MZ세대 중 'M'의 앞부분에 속한다. '엑스세대' 선배들과 우리 세대들은 듀스라는 그룹을 알 것이다. 듀스의 노래 중 1993년 발매된 '우리는'이라는 곡이 있다. 초등학교 때 테이프로 들었던 기억이 난다. 20년이 지난 뒤에 그 노래가 내 마음과 같을 줄은 어찌 알았으랴? 세포라와 본격적인 개발을 시작할 때 내 마음 이 노래 같았다. 한 마디로 멘붕이었다. 차라리 그냥 멍 때리고 서명할 때가 좋았다. 


여러 가지 사항들을 조율한 뒤 본격적인 개발업무가 시작되었다. 최종 런칭 품목으로 선정된 품목은 핸드 마스크팩 3종, 립 마스크 2종으로 총 5 품목이었고, 총수량은 700,000 장이었다. 금액으로는 약 3억 원 규모였다. 그 당시에 비해 엄청나게 성장한 화장품 산업 규모를 감안하더라도 그 초도 계약 규모 치고는 엄청난 것이다. 

그런데 정말 심각한 문제는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이다. 지금이야 화장품 해외영업 실무 강의를 할 정도 전문가 수준의 지식과 정보를 보유하고 있지만, 그 당시엔 화장품이라고는 꽃마차(참고. 로드샵 등장 이전 경기도 안성에 있던 화장품 매장)에서 스킨로션 세트를 구매해서 여름엔 스킨, 겨울엔 로션을 쓰는 보통의 남자가 알고 있는 정도의 화장품 지식만 알고 있었다. 한 마디로 화장품에 대해서는 정말 무지했다. 더 심각한 문제는 물어볼 사람조차 없다는 것이다. 화장품 수출을, 그것도 수출 불모지인 유럽지역에, 세계에서 가장 큰 화장품 유통기업과 협업을 경험해본 사람 자체가 많지 않다. 


그런 상태로 개발이 시작된 것이다. 그 당시 세포라와 협업만 진행했던 것은 아니다. 해외영업과 국내영업을 병행했다. 대략 하루 일과를 정리해보면 이렇다. 

08:30 출근, 이메일 확인, 해외 업체에서 요청한 내용 유관 부서 전달

10:00 외근, 국내 브랜드사 미팅 및 국내 영업 관련 업무 

15:00~16:00 외근 복귀, 유관부서에서 작성된 내용들을 취합하여 해외 업체 이메일 발송

19:00~20:00 퇴근  

22:00~24:00 재택근무(?) 시차로 인해 해외 담당자들과 전화, 이메일 등 업무 처리 

이렇게 2014년 8월부터 2015년 2월까지 업무를 했던 것 같다. 

밤늦게까지 업무를 처리해도 다음날이면 마치 데자뷔처럼 엄청난 양의 이메일이 도착해있었다. 출근하기가 무서울 정도였다. 사무실에 도착해 컴퓨터를 켜고 엄청나게 쌓인 이메일을 읽을 때는, 마치 세계 2차 대전에 참전한 암호병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분명 영어로 적힌 이메일이고, 나 정도 영어 실력이면 유창하진 않아도 해석엔 문제가 없어야 했는데 해석이 아니라 해독을 해야 했기에 문제였다. 마치 적군이 모스부호로 발송한 무선 신호를 감청하여 비밀문서를 해독해야 하는 정보병 같았다. 


도저히 혼자서는 암호를 풀 수 없었다. 그래서 영어를 번역한 뒤, 연구팀장, 품질팀장과 함께 암호 해독을 했다. 아무래도 영어는 내가 낫지만 전문용어는 그들이 더 낫기 때문이다. 그렇게 암호 해독을 마치고 업무를 분장 한 뒤 국내 영업을 위해 외근을 나갔다. 오후에 사무실로 복귀해서는 연구소와 품질팀에서 작성한 자료를 다시 암호화 작업을 하여 해외로 발송했다. 이런 작업을 6개월 동안이나 했다. 


사과의 달인 

사실 6개월 동안 영어로 험한 소리를 많이 들었다. 직접 육성을 통해 들은 건 아니지만 촉이 있다. 이메일을 읽다 보면 이메일 작성자의 그 당시 감정이 느껴졌다. 분노가 느껴졌다. 그런데 다 이해가 된다. 나라면 더 했을지도 모른다. 창피하지만 우리가 벌인 만행에 대해 한 번 읊어보겠다.


서류 준비 미비로 인해 빈번한 서류 발송 지연

서류 준비 미비로 인해 10가지를 요청하면 5~6개 정도의 서류만 발송함 

서류 준비 미비로 인해 'A' 서류를 발송해야 함에도 'B', 'C' 서류를 발송함 

위와 같은 일들을 6개월 동안 지속적으로 반복함. 


그래서 나의 이메일 첫 문장은 항상 'I am sorry for that', "I apologize for that', 등의 문구로 시작했다. 서명의 달인에 이어 사과의 달인이 되었다. 정말 그들의 참을성, 인내심에 경의를 표한다. 그 당시 그 제품을 생산하는 곳이 거의 없었기에 망정이지 다른 대안이 있었으면 가차 없이 버려졌을 것이다. 


해외 기업들과의 협업은 항상 어렵다. 언어와 문화, 용어 등의 차이로 인해 항상 초반엔 많은 비효율을 수반한다. 특히 그 상대가 글로벌 기업일 때는 더욱 힘들다. 그들이 정한 기준대로 맞추지 못하면 사실 후속 업무를 진행할 수가 없다. 그들에게는 대안이 많기 때문이다. 일종이 진입장벽이다. 그래서 울며 겨자 먹기로 다 맞춰줄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때는 그들이 울며 겨자를 먹었다. 


그렇게 5개월 동안 열심히 헤매고 있을 때 프랑스 본사 구매팀 이사로부터 이메일이 접수되었다. 


6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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