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한 달은 멀뚱하게 지냈던 것 같다. 어수선한 집을 정리하느라 지쳐서. 둘 다 아파서 골골대느라. 부산이 좋은 줄도 모르고 집에 들어앉아서 멍하니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어서 지나길 바랐던 9월이 가고 10월이 되자 부산에서 맞이하는 첫가을을 이렇게 보낼 수는 없다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가을 부산은 축제가 끊이지 않았다. 부산국제영화제와 불꽃축제 외에도 동래읍성축제, 차이나타운 축제, 수제맥주페스티벌… 우리의 달력에는 축제 일정이 빼곡히 적혔다. 만족스러운 축제도, 다소 실망스러운 기억도 있었다. 그래도 지나면 모두 좋은 기억으로 변했다. 지난해 가을 우리는 축제를 즐기느라 바쁜 나날을 보냈었다.
광안리 바다는 주말 저녁이면 투어 중인 요트에서 쏘아 올리는 불꽃으로 화려하다. 한두 대에서 쏘아 올리는 게 아니라 모여든 요트에서 동시에 쏘아 올리는 불꽃이라 꽤 볼만하다. 사람들은 멈추어 서서 그 순간을 사진에 담는다. 매주 불꽃축제가 벌어지는 것만 같다.
11월 초, 우리가 살고 있는 광안리 바다에서 진짜 불꽃축제가 열린다고 했다. 바닷가의 가게들은 며칠 전부터 자리 예약을 받았다. 바가지요금이 이슈가 되어 뉴스에 오르기도 했다. 집 앞에서 축제가 벌어진다는데 괜히 설렜다. 돈을 내고 자리를 예약할 필요 없이 그냥 집에서 보면 되는 거였다. 앞 건물에 가려 광안대교가 완전히 보이지 않는 것이 아쉬웠으나 그건 건물 옥상에서 보면 괜찮을 것 같았다. 평소 축제에 그리 관심이 없던 언니도 이사 간 동생네 구경도 할 겸 내려와 함께 축제를 즐기기로 했다.
불꽃축제 전 우리는 손님맞이 준비로 분주하게 보냈다. 손님용 이불을 사고, 마트에서 평소에는 비싸서 먹지 않을 과일도 사다 냉장고에 채워 넣었다. 우리 집 옥상 정도면 잘 보이겠지? 수많은 인파에 휩쓸리지 않고도 축제를 즐길 수 있겠지?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게 웬걸... 축제를 앞두고 관리실에서 공지사항을 붙여놓았다. 안전상의 이유로 옥상을 폐쇄한다며 집에서 관람하거나 해변으로 나가서 보라고 했다. 아니 왜... 아파트에 사는 사람을 위해 만들어둔 옥상정원인데. 왜. 왜. 집에서는 뷰가 잘리고, 나가면 수많은 사람들에 휩쓸려야 하는데. 왜. 왜!
축제 날 예정대로 언니와 형부가 내려왔다. 우리는 포장해 온 피자에 와인을 마시며 집안에서 불꽃을 감상하기로 했다. 축제 몇 시간 전부터 테스트 불꽃을 쏘아 올렸다. 아.. 역시 잘린다. 30% 정도 잘린 불꽃을 보니 아무래도 아쉬웠다. 마음이 급해졌다. 그와 나는 나가서 보자 했고, 언니와 형부는 집에 남아있기로 했다.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한 이들이, 이미 자리를 잡은 이들 틈을 비집고 줄을 지어 이동했다. 잘 보이는 자리를 찾을 여유는 없었다. 우리는 사람들 사이로 떠오르는 불꽃을 봐야만 했다. 높이 쏘아 올리는 불꽃은 잘 보였지만, 다리에서 폭포처럼 흘러내리는 불꽃과 바지선에서 쏘아 올리는 불꽃은 잘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그래도 좋았다. 커다란 심장소리와 함께 검은 하늘로 솟아오른 불꽃은 완전하지 않아도 충분히 만족스러운 것이었다. 불꽃을 눈에 담느라 폰을 꺼낼 생각도 못했다. 사진을 찍느라 불꽃을 제대로 즐기지 못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은가. (그래서 불꽃 사진은 없습니다.)
축제가 없어도 주말 저녁 광안리는 언제나 붐빈다. 그건 토요일마다 드론쇼가 펼쳐지기 때문이다. 불꽃은 잘려 보일지 몰라도 우리 집은 드론쇼 명당이다. 집안에 앉아서 드론쇼를 볼 수 있다. 지난해 마지막 날은 새해 카운트다운과 함께 드론쇼를 한다고 해서 오랜만에 밖으로 나갔다. 평소 토요일 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거의 불꽃축제만큼 온 것 같았다.
23년 12월 31일 11시 55분. 지금 쯤이면 드론이 뜨기 시작해야 할 것 같은데 조짐이 없다. 언제나 칼같이 시작했는데. 심상찮은 느낌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잠시 후 안내 방송이 나왔다. 통신장애로 30분 정도 지연 예정이란다. 새해 카운트다운에 30분 지연은 너무 치명적이었다. 우리는 집으로 돌아왔고, 그날 드론쇼는 열리지 못했다.
다음날 저녁 드론쇼가 재개되었다. 그날도 늦장 공연이 되어버렸지만, 평소보다 많은 드론으로 만든 청룡은 웅장했다. 저걸 제때 했으면 얼마나 감동이었을까…
오늘도 우리 집 앞은 소란하다. 우리는 그 소란을 즐긴다. 한껏 꾸민 모습으로 연인과 데이트 중인 젊은 커플들. 쌀쌀한 날씨에 입은 얇은 옷에 괜히 마음이 쓰인다. 같은 점퍼를 맞추어 입고서 해변을 패기 있게 뛰어다니는 수십 명의 아이들. 삼대가 함께 찾아와 광안대교 앞에서 사진을 찍으려 애쓰는 가족들. 그리고 간혹 해변 중앙의 넓은 광장에는 나무판자와 의자 같은 것들을 들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뚝딱뚝딱 작업을 끝내면 해변가는 공연장으로도, 전시장으로도 변한다. 오늘도 축제가 시작되려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