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나는 도서관을 자주 찾는 사람이었다. 한참 책 읽기에 빠져있던 어린 시절에는 일주일이 멀다 하고 책을 빌리러 다녔다. 당시에는 2주에 2권밖에 대출이 되지 않았기에 방학이 되면 2, 3일에 한 번씩은 책을 빌리기 위해 도서관으로 향했다. 시험공부를 위해서도 자주 찾았다. 시험 기간이 되면 도서관은 열람실 자리를 차지하기도 어려울 만큼 어린 사람들로 붐볐다.
어른이 되어서는 도서관을 자주 찾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대학 때는 노느라 바빠서? 회사원이 되면서부터는 먹고살기 바빠서? 매일 야근에, 집에 돌아오면 밤 10시를 훌쩍 넘겼으니 책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맥주 한잔이 더 간절했지...) 그래도 어린 시절 기억이 있어서인지 집을 구할 때 도서관이 가까우면 괜히 좋았다. 마치 자주 가기나 할 것처럼. 하지만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던 그 도서관에 한 번을 가지 않았다. 은퇴를 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회사를 그만두고 그와 하루 루틴을 만들면서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낸 곳은 카페다. 작은 카페는 오래 있기 미안하니 이왕이면 대형카페로. 개인이 하는 곳보다는 본사 직영인 곳으로. 그곳에서 우리는 커피를 마시며 두세 시간 정도 시간을 보냈다. 그건 마치 출근하는 기분, 어딘가에 소속되었다는 기분이 들게 했다. 소속감을 느끼면서도 내 뜻대로 시간을 꾸릴 수 있는 그런 장소였다.
하지만 가끔은 매일 들어가는 커피 값이 아까웠다. 탄맛 나는 스타벅스 커피 보다 집에서 모카포트로 만든 커피가 더 맛있기도 했다. 카페에서 당연히 나는 소음을 피하고도 싶어졌다. 스터디 카페에도 가보았으나 너무 학구적인 분위기라 부담스러웠다. 우리는 공부를 할 것도 아니었으니. 그래서 찾게 된 곳이 도서관이다. 책으로 둘러싸인 트인 공간. ASMR처럼 들리는 책 넘기는 소리. 오래 있어도 눈치가 보이지 않고,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쾌적한 장소가 바로 도서관이었다.
부산의 우리 집 근처에는 가까운 도서관이 없다. 그나마 가까운 도서관은 걸어서 30분 정도 거리에 있는 수영도서관. 이전에도 우리는 집 앞 도서관을 두고도 30분을 걸어 호수공원 안에 있는 푸른 숲 도서관을 즐겨 이용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가는 길이 좋아서. 도서관 내부 공간이 마음에 들어서. 동네 도서관은 뭐랄까. 너무 전형적인 도서관이었다. 반면 푸른 숲 도서관은 눈길이 가는 곳곳이 푸릇푸릇해서 좋달까.
수영도서관은 재건립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도서관이어서 열람실 공간이 근사했다. 위치도 금련산 아래여서 도서관 주변이 푸릇푸릇. 첫날은 도서관 탐방이 목적이어서 한 층 한 층 찬찬히 둘러보았다. 한쪽 벽에는 이런저런 도서관 행사를 홍보하고 있었는데, 마침 김초엽 작가와의 대화가 예정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선착순 마감이라니! 그 자리에서 스마트폰을 열어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다행히 자리에 여유가 있었다. 강의가 있던 날, 집에 있던 김초엽 작가님의 책 한 권을 챙겨가 사인을 받았다!
수영도서관에 대한 인상이 좋았다. 앞으로 자주 이용하게 될 것만 같았다. 도서관만 마음에 들면 그깟 30분이 대수겠는가. 그러나 공원 산책 30분과 도로를 따라 걷는 30분의 차이는 생각보다 컸다. 도서관에 가자,라고 말을 꺼내는 것이 망설여질 만큼. 도서관에 가는 길, 우리는 지나다 보이는 아파트를 보면서, 집을 여기로 구했어야 했는데, 하는 대화를 주고받았다.
가는 길이 편하지 않으니 수영구도서관에 가는 횟수가 점점 줄어들었다. 우리는 대신 큰 창으로 광안대교가 훤히 보이는 집 근처 대형 카페로 향했다.
어느 날, 내 속을 들여다본 것처럼 인스타 추천 게시물로 부산의 도서관이 떴다. 우리는 그중에서 집에서 비교적 가까운 도서관 탐방을 다니기로 했다. 처음으로 찾은 곳은 F1963 도서관. 이곳은 과거에 고려제강 와이어 공장이 있던 곳을 복합문화공간으로 재탄생시킨 곳이었다. F1963은 도서관이 아닌 공간 자체로도 매력적이었다. 전시공간과 YES24 중고서점, 수제맥주 전문점 그리고 대나무로 둘러싸인 소리길을 걷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F1963 도서관은 예술전문 도서관으로 회원제로 운영되고 있었다. 가입비는 연간 10만 원. 1년을 이용하는 비용이라고 생각하면 비싼 건 아니었다. 비회원도 일일 이용료 5천 원만 내면 3시간 동안 이용할 수 있어서, 우리는 우선 비회원 자격으로 도서관을 이용했다. 도서관 입구에 있는 사물함에 가방과 외투를 보관하고, 아이패드를 들고서 도서관으로 들어갔다. 유료로 운영되고 있어서인지 사람이 많지 않았다. 이곳에는 일반 도서관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다양한 예술서적이 많았다. 도록이나 음반 같은 것들을 살피며 도서관을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훌쩍 지났다. F1963 도서관이 꽤나 만족스러웠기에 우리는 회원가입을 할지 망설였다. 그러나 역시 너무 멀었다. 대중교통으로 오기에는 여러 번 갈아타야 했고, 차를 가져오면 적지 않은 주차비를 내야 했다. 가끔 나들이 삼아 오는 걸로 결정.
민락수변공원을 지나서 수영강을 따라 걷는 갈맷길은 그와 자주 산책하는 장소다. 민락수변공원에서 보는 해운대 마린시티와 광안대교 풍경은 언제 봐도 아름답다. 수영강 길은 데크가 깔린 보행 전용 도로라 걷기에도 좋다. 이 길을 따라 벚나무가 심겨 있는 걸 보면 봄에 벚꽃 만발할 풍경이 떠올라 벌써부터 설렌다.
수영교에서 강을 건너면 센텀시티가 나온다. 이곳에는 영화의 전당이 있다. 부산 국제 영화제가 열리는 때가 아니어도 영화의 전당 광장은 각종 공연이나 행사로 분주하다. 영화의 전당에는 세 개의 건물이 있다. 주로 영화를 상영하는 시네마운틴과 사무실과 아카데미가 있는 비프힐 그리고 도서관이 있는 더블콘. 전에는 여기 도서관에 가볼 생각을 하지 못했다. 시간을 보낼 장소가 있을 것 같지는 않아서였다. 그러다 추천 게시물에서 사진을 보고 한번 와봐야겠다 싶었다.
영화의 전당에 있는 도서관이니 당연하게도 영화전문 도서관이다. 영상자료를 볼 수도 있고 영화 관련 도서와 원작 소설이나 만화책까지 갖추었다. 그리고 꽤 넓은 열람 공간! 영화의 전당 도서관 열람실은 언제 와도 자리가 여유로운 데다가 창가로 멋진 수영강뷰가 펼쳐진다. 집에서 꽤 멀리 떨어져 있지만 산책길이 아름답고, 도서관을 나와서는 영화의 전당 영화관에서 영화도 한편 볼 수 있으니 더없이 만족스러웠다. (영화의 전당 영화관 이야기는 다음에 자세히.. ) 아마 부산 생활의 만족도가 높은데 가장 큰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다.
이제 우리는 도서관 탐방을 끝내고 영화의 전당 도서관에 정착했다. 책을 빌려볼 수 없는 점이 조금 아쉽지만, 우리에게는 밀리의 서재가 있으니까.
처음 가보는 곳에서 우리는 여전히 도서관을 찾는다. 북항 재개발 구역에서는 협성문화재단에서 운영하는 북두칠성 도서관에. 부산 근현대역사관에 갔다가는 이전에 동양척식주식회사 건물이었던 별관 도서관으로. 그냥 들리기에는 아쉬우니까 앉아서 책도 한 권쯤 읽고, 다음에 여기 오면 뭘 할까, 하며 일정을 계획해보기도 한다. 여행을 가서도, 머무는 곳에서도, 도서관은 괜히 좋은. 마음이 편안해지는 그런 공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