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걷다 정동길을 지나서 광화문 시네큐브까지. 내가 서울에서 가장 좋아하는 길이다. 나는 그곳에서 아주 느린 산책을 하고는 했다. 주말보다는 굳이 휴가를 내서 평일에 가는 것을 좋아했는데, 카페에 앉아 바쁘게 지나는 회사원들을 보고 있으면, 내가 휴가 중이라는 사실에 행복해지기 때문이었다. 나의 느린 산책은 시네큐브에서 영화를 보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그곳에서 상영하는 어떤 영화라도 좋았다. 그냥 가장 가까운 시간에 상영하는 영화를 골라도 후회는 없었다.
서울을 떠나 경기도 남부에 정착했을 때, 가장 아쉬웠던 건 바로 그 길이었다. 그리고 느린 산책 후 보던 영화 한 편. 동네 멀티플렉스 영화관에서 상영하는 영화는 다 비슷비슷했다. 1, 2, 3관이 모두 같은 영화를 상영할 때도 있었다. 보고 싶었던 영화를 상영하는 극장을 찾지 못해 OTT에 올라오길 기다렸다 보는 일이 흔해졌다. 점차 영화를 보는 횟수도 줄어들었다. 회사일이 힘들어지면서는 생각할 것이 많은 영화보다는 자극적이고 흥미 있는 시리즈나 예능을 찾게 되었다. 감정 소모가 많은 영화는 보기가 괴로웠다.
광안리해수욕장에서 수영강을 따라 걷다 영화의 전당까지. 내가 부산에서 가장 좋아하는 길이다. 우리는 그곳에서 아주 느린 산책을 한다. 주말, 평일 아무 때나 상관없다. 아침에 일어나 하늘을 보았을 때 햇살이 맑다면 바로 그날이다. 잔잔한 바다가 햇살을 받아 퍼지는 윤슬을 보는 것도. 고양이들이 일광욕을 하며 털을 가다듬는 것을 지켜보는 것에도 오랜 시간을 들인다.
매주 화요일은 날이 흐리거나 비가 내려도 우리는 산책을 한다. 그날은 바로 영화의 날이기 때문이다. 무언가 하기로 했을 때 딱 정해두지 않으면 까먹기 십상이다. 언젠가는 하겠지 하며 흘려보내다 그대로 잊혀 버린다. 그래서 우리는 영화를 보는 것에도 루틴을 만들었다. 그것이 바로 우리 가족 공식 행사인 영화의 날이다. 영화의 전당은 요일마다 상영하는 영화가 조금씩 달라서 화요일에 보고 싶은 영화가 없다면 가끔은 다른 날로 바꾸기도 한다. 그래도 주말은 피한다. 주말에는 사람이 너무 많다.
영화의 전당은 상업영화부터 예술영화까지 다양한 영화를 상영한다. 티켓비도 저렴해서 일반 영화는 8,000원, 시네마테크 영화는 7,000원이다. 우리는 영화의 전당 연간회원에 가입했는데, 가장 저렴한 레인보우 등급도 2,000원을 할인해 준다. 영화 초대권 2매를 주고 생일은 무료 관람이 가능해서 자주 영화를 본다면 연간회원에 가입하는 것도 괜찮은 것 같다.
이곳에서 처음 본 영화는 ‘플라워 킬링 문‘이다. 중극장에서 상영을 했는데, 스크린도 크고 사운드도 훌륭해서 깜짝 놀랐다. 엔딩에 오세이지족의 춤과 노래가 나올 때, 마치 그들과 함께 들판에 서있는 듯한 기분이 들 정도였다. 부산국제영화제를 치르는 곳이라 그런가. 좌석의 앞뒤 간격도 넓고, 의자도 편해서 지금껏 가본 극장 중 제일 마음에 들었다. 영화의 전당 시네마운틴에는 총 3개의 극장이 있는데, 중극장에서는 주로 상업영화를 상영하고, 소극장과 시네마테크관에서는 예술영화를 상영한다. 개봉 영화가 아닌 오래된 영화나 추모전, 소규모 영화제가 있기도 해서 선택의 폭이 다양하다.
요즘 세상에는 즐길 수 있는 콘텐츠가 흘러넘친다.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숏폼부터 넷플릭스, 디즈니플러스 같은 다양한 OTT까지. 하루 종일 스마트폰만 보고 있어도 지루하지 않다. 부산으로 이사 오면서 TV를 없애서 미디어에 노출되는 시간이 좀 줄지 않을까 했는데 비슷한 것 같다. TV 대신 장만한 빔프로젝터의 성능이 매우 만족스럽기 때문이다. 거실의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울 만큼 화면이 커서 굳이 영화관에 갈 필요가 없을 정도다. 그래도 집에서 보는 것과 영화관에서 보는 것의 차이는 있는데, 그건 바로 몰입감이다. 집에서는 할 수 있는 것들이 너무나 많다. 영화를 보다가 스마트폰을 열어 보기도 하고, 아무 때나 화장실에 갈 수도 있으며, 조금이라도 지루하면 나가버리거나, 놓친 장면은 언제든 다시 돌려볼 수 있다. 지나치게 편리하다. 그 편리함 때문에 영화에 깊이 파고들기가 어려운 건 아닐까. 영화관에서는 한 번 놓친 장면을 돌려볼 수 없다. 그 불편함이 몰입을 만든다.
영화의 전당에서 돌아오는 길, 우리는 그날 본 영화에 대해 토론한다. 주인공의 선택에 설득력이 없다거나 캐릭터가 너무 평면적인 건 아닌가, 하는 이야기를 나눈다. 만약 서로의 감상이 다르다면 치열한 논쟁을 벌인다. 그게 뭐라고 감정이 상할 만큼 아주 맹렬한 기세다. 영화에 깊게 몰입한 후 그와 나누는 그 시간들이 좋다. 나의 취향, 그의 취향에 대해 더 깊게 알아가는 시간이다. 함께한 시간이 아무리 길다 해도, 인간이라는 동물은 매우 복잡해서 그 끝을 알 수 없을 만큼 새롭다. 매주 화요일 그와 나는 서로에 대해 조금씩 더 알아가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