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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dle Feb 22. 2024

우리가 달리는 목적은 기록에 있지 않다

 산책은 우리의 일상에서 많은 시간을 들이는 일이다. 새로운 장소에 머물 때 가장 먼저 하는 일이기도 하다. 발길 닿는 대로 돌아다니는 우리의 산책은 걷기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집밥이 귀찮을 때 가끔 와서 먹을 백반집을 찾는다거나 도서관 대신 시간을 보낼 적당한 카페를 탐색한다. 세탁소와 빵집, 약국과 병원의 위치도 파악해 둔다. 지도앱을 통해서 정보를 찾을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눈으로 보고 선택하는 것을 선호하는 편이다. 오랫동안 디지털 서비스를 만들었지만 실은 아날로그형 인간이랄까.


 산책을 좋아하는 우리가 즐겨하는 게임이 있다. 그건 걸어 다니면서 꽃을 심는 게임이다. 우리와 함께 걷는 게임 속 캐릭터들은 주변을 탐색하며 모종을 찾거나 조그만 과일을 가지고 온다. 우리는 그들이 꽃을 피울 정수를 주면서 친밀도를 높인다. 친밀도가 높아진 녀석들은 태어난 곳으로 돌아가 선물을 하나씩 가지고 온다. 알고 보면 선물이라기보다 자신을 귀엽게 꾸민 것에 가깝다. 그게 머라고 은근한 수집욕을 자극하는데, 우리는 그 데코들을 빠짐없이 모으기 위해 몰두한다.


 게임 속 지도에는 우리가 길을 걸으며 심은 꽃들이 활짝 피어있고, 걷지 않은 길은 뿌연 구름 속에 감추어져 있다. 그는 나에게 산책을 제안할 때 ‘꽃 심으러 가자’라고 말한다. 가끔 새로운 길로 산책을 떠나고 싶다면 ‘우리 구름 없애러 갈까?’라고 한다. 이 게임을 시작한 지 벌써 1년을 훌쩍 넘었지만, 그가 나에게 게임하러 가자고 하는 이 말이 아직까지도 무척 낭만적으로 느껴진다.


Pikmin bloom에서 우리가 심은 꽃길


 산책을 하며 유심히 살피는 것 중 하나는 아침 달리기 코스를 찾는 일이다. 차가 다니지 않고, 오르막 내리막이 심하지 않으며, 둘이 나란히 뛰어도 지나는 사람에게 방해가 되지 않을 만한 길을 찾는다. 다행히 부산의 우리 집에서 차도 하나만 건너면 갈맷길과 연결된다. 늘 붐비는 광안리지만 이른 아침에는 한산하기 때문에 달리기에 적당하다.


 우리 말고도 이 길을 달리는 많은 이들을 만난다. 특히 주말에는 러닝크루도 여럿 눈에 띈다. 한참 뒤에서 시작한 것 같은데 어느새 그들은 우리를 앞지른다. 얼핏 봐도 우리보다 열 살은 더 어려 보이는 청년들이다. 우리가 달리는 목적은 기록에 있지 않으니 그들을 앞서 보낸다. 나는 약간의 부러움이 2%쯤 섞인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본다.


 가끔 혼자서 달릴 때가 있는데, 그럴 때면 숨이 가쁘지 않게 평소보다 느린 속도로 뛰었다. 혼자 달리던 어느 날, 젊은 남자 하나가 운동화 끈을 질끈 묶는 게 보였다. 그리고 늘 그렇듯 나를 앞질러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날따라 왠지 뒤처지고 싶지 않았다. 있는 힘을 다하여 달리기 시작했다. 초반에는 조금 힘든가 싶더니 곧 아드레날린이 샘솟는 게 느껴졌다. 나의 두 다리는 절로 빠르게 굴러갔다. 2분쯤 지났을까 나는 멀리 가던 그 사람을 앞질렀다. 뒤에서 분주하게 달려오는 그 사람의 발자국 소리가 들렸고, 나는 그 소리에 더 힘을 내어 발을 굴렀다. 마지막 지점에 도착해서 기록을 확인했다. 나의 1km 구간 최고 속도였다.


 집에 와서 씻고 편안한 의자에 앉았다. 달릴 때는 느끼지 못했던 피곤함이 몰려왔다. 오후가 되자 노곤하게 졸음도 쏟아졌다. 꾸벅꾸벅 졸고 있는 나를 보며 그가 말했다. ‘젊은애 하나 이겨보겠다고 무리하더니만.’ 우리가 달리는 목적은 기록에 있지 않았는데. 나는 아직까지 욕심을 모두 내려놓지 못했나 보다.


저 위를 달리고 싶다!


 우리가 달리는 코스에서는 종종 행사가 벌어진다. 갈맷길 걷기 대회라던가 마라톤 같은 것들. 달리기를 오래 했지만 아직까지 마라톤 대회에 참가할 생각은 못했었다. 계속 말했다시피 기록이 목적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데 부산의 마라톤 대회에는 관심이 생겼다. 그건 바로 광안대교 위를 건너는 코스였기 때문이다. 늘 바라보기만 하던 광안대교 위를 달린다. 금지된 것을 몰래 행하는 것 마냥 자극적으로 느껴졌다. 호기심이 생겼다. 그러나 홈페이지에 들어가 신청하려고 보니 이미 마감이었다.


 마라톤 대회가 있던 날, 우리는 평소보다 빨리 달리기 위해 길을 나섰다. 마라톤 대회에 참가하는 이들과 겹치지 않기 위해서였다. 반환점을 돌아 집으로 오는 길 번호표를 달고 뛰는 그들과 마주쳤다. 오스트리아 빈에서 본 마라톤 대회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들 손에 들려있던 완주 메달이 갖고 싶었는데. 우리가 달리는 목적이 기록에 있지는 않지만, 그 메달 하나는 갖고 싶었다.


 그리고 오늘, 드디어 광안대교를 건너는 마라톤 대회 접수에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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