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을 가득 채우고 있던 이사 박스를 정리하고, 재활용 쓰레기를 버렸다. 아직 제자리를 찾지 못한 물건들이 있어 어수선하다. 찝찝하지만 일단 눈을 감기로 한다. 그래도 잠잘 곳, 앉아서 쉴 곳, 밥 먹을 곳은 마련되었으니 그게 어딘가. 나머지는 차차 자리를 찾아갈 것이다.
이삿짐 정리를 마무리하고 그와 동네 탐방을 하기로 했다. 가끔 여행이야 왔지만, 둘 다 부산에 살아본 적은 없으니 아는 것도 없다. 사직 야구장은 여기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가까운 곳에 대형 마트는 있는지. 걸어서 다닐만한 도서관이 있는지. 우리가 동네에 대해 아는 거라곤 광안리 바다의 풍경이 아름답다는 것뿐이었다.
집을 나서자 어디선가 냐아옹 소리가 들렸다. 애처롭다. 무언가 간절히 요구하는 울음소리 같았다. 잠시 후 검은색 줄무늬 고양이 한 마리가 우리 쪽으로 서서히 다가오더니 그의 다리에 몸을 비볐다. 우리 초면인데... 길냥이가 이렇게 애교를 부리니 그냥 지나갈 수가 없었다. 쭈그리고 앉아 조그마한 머리를 쓰다듬어 본다. 좋아하는 것 같진 않지만, 피하지도 않았다. 새로운 두 사람이 나타났다. 고양이는 다시 애처로운 울음소리로 그들에게 다가가 몸을 비빈다. 고양이의 애교에 당해낼자가 어디 있겠는가. 그들도 쭈그리고 앉아 고양이를 바라본다. 둘은 무언가 얘기를 주고받더니, 한 사람이 편의점을 향해 달려갔다. 얼마 후 그는 손에 통조림을 들고 나타났다. 그들은 구석진 곳으로 고양이를 이끌고 가 통조림을 따서 바닥에 놓아주었다. 고양이는 분홍 혓바닥으로 통조림을 조금씩 먹기 시작했다. 어느새 고양이 한 마리를 사이에 두고 네 사람이 마주 앉은 형태가 되었다.
“길냥이가 이렇게 사람을 따라서 우야노. “
“원래 이 동네 사는 고양이예요?”
“얼마 전에 나타났는데, 사람만 보면 울어요. “
우리는 고양이를 주제로 짧은 대화를 나누었다. 신기한 건, 그들이 우리와 얘기할 땐 표준말로, 그들끼리 대화할 때는 부산 사투리를 쓴다는 거였다. 억양이 전환된다는 것을 느끼지 못할 만큼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고향은 부산이고, 학교 아니면 직장이 서울인 사람들일까. 그들은 2개 국어를 자연스럽게 구사하는 바이 링구얼 같아 보였다.
그들과 헤어진 우리는 횡단보도를 건너 해안을 따라 걸어보자고 했다. 그때 건너편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좁은 골목길로 접어드는 것을 보았다. 저기에 뭐가 있길래. 별거 없어 보이는 데. 호기심이 생긴 우리는 그들을 따라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골목길은 번쩍이는 바닷가와는 다른 느낌의 아늑한 거리였다. 붉은 벽돌로 된 주택 1층을 개조한 카페, 양대창집, 주점, 일식집과 그 밖의 이국적인 가게들이 이어졌다. 약간 을지로 같은 느낌이랄까. 군데군데 오래된 노포도 보이고, 간판은 슈퍼인데 고급 레스토랑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곳도 보였다. 이래서 많이들 오는 거였구나.
당장 밥을 먹거나, 술을 마시거나 할 건 아니어서 다시 바닷길로 나왔다. 거리는 버스킹이 한참이었다. 춤을 추는 사람, 마술을 하는 사람,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 귀를 끄는 소리가 있으면 머물면서 우리는 느린 산책을 즐겼다. 걷다가 보이는 오락실에서 인형 뽑기 하는 사람들을 구경하기도 했다. 시크한 무표정의 토끼 인형이 보이길래 토끼띠인 그를 위해 내가 뽑아 주겠다 했다. 이런 건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어서, 별 기대 없이 버튼을 눌렀는데. 이게 웬걸! 난 인형을 뽑는 데 성공했다. 그 성취감이란. 절로 바닥을 세 번 뛰어오르고 손을 뻗치며 소리를 지르게 되는 기쁨이었다.
“자, 남편 가져.”
“나를 위해 인형 뽑아주는 여자가 로망이었어.”
하며 그는 수줍은? 웃음을 짓는다. (다음 산책 때 수달 인형 뽑기에도 성공했다!!)
처음 집을 구하려고 했던 민락포구 쪽으로 접어들었다. 바다 쪽으로는 작은 어선들이, 길 건너편에는 활어직판장과 횟집 몇 개가 이어진 길이었다. 냐아옹 어디선가 또 작고 가냘픈 소리가 들려왔다. 발길을 잡아끄는 울음소리. 우리는 소리를 찾아 걸었다. 앞치마를 두른 아주머니 한분이 고양이들에게 막 썰은 회를 주고 있었다. 네다섯 마리쯤 돼 보이는 고양이들이 냐아옹 하며 몰려들었다. 부산 고양이는 회도 먹으면서 사는구나!
벤치에 앉아 가만히 고양이들을 지켜보았다. 그런데 아직 새끼인 듯 작은 몸집의 고양이 한 마리가 다가오더니, 내 무릎 위로 훌쩍 뛰어오르는 게 아닌가. 허벅지 위로 고양이의 따뜻한 온기가 전해졌다. 고양이가 편히 앉도록 뒤꿈치를 들어 올려 높이를 맞춰주었다. 작은 몸이 부서질라 조심스레 쓰다듬어 본다. 행복하다. 튀르키예 여행 이후 오랜만에 느껴보는 행복이다. 친절한 부산사람들은 사람에게뿐만 아니라 고양이에게도 잘해주는 모양이다. 사람을 피하지 않는 고양이가 있는 걸 보면.
이후 우리의 동네 산책 코스가 정해졌다. 저녁 식사를 하고 설거지를 끝내면, 고양이 보러 갈까, 하고 길을 나선다. 오늘도 집 앞 고양이는 새로운 사람들에게 몸을 비비고 있다. 저들도 곧 편의점으로 달려가게 될 것이다. 이 녀석, 볼 때마다 더 토실토실해지는 것 같다. 집 앞 고양이에게 주려고 가져왔던 간식을 다시 주머니에 넣고 돌아선다. 이제 횟집 고양이들을 만나러 갈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