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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dle Mar 07. 2024

문화생활을 누리며 살 수 있을지 몰랐다

 미학 강의를 들었던 적이 있다. 대학교 교양 수업시간이었다. 무언가 대단한 열의를 가지고 청강한 것은 아니었고, 근사한 학문인 것 같다는 호기심에서였다. 당시 나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미술관을 들락거린다거나, 고전을 찾아 읽으며 문화적 소양을 높이기 위해 애썼다. 아름다움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가지고 있었다. 미학을 배우면 나도 예술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그 강의를 들었던 것 같다.


 하지만 미학이라는 학문은 당시 나에게 너무나 어려웠다. 수업시간에 나는 졸음을 참지 못하고 고개를 꾸벅거리기 일쑤였다. 그 수업이 남긴 건 매우 어렵고 두꺼운 교재한권과 교수님이 추천해 주셨던 책, 영화, 공연을 보았던 기억뿐이다.


 오페라를 보고 감상문을 리포트로 제출하라는 과제가 있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듯한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의 가장 저렴한 티켓을 샀다. 공연당일 나는 친구들과 놀다 공연 시작 시간을 놓쳐버리고 말았다. 1막은 다 흘려보내고 2막이던가 3막부터 보기 시작했던 것 같다. 내가 예매한 좌석은 3층 구석에 있었는데,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고, 시야도 가렸다. 라 트라비아타 하면 아는 거라고는 축배의 노래뿐이었는데 듣지 못했다. 그건 1막에 나오는 거였다.


 이십 대의 나는 아름다움에 대한 막연한 동경만 있었을 뿐 즐기지는 못했다. 또래들과 어울려 수다를 떨고, 술을 마시는 것이 훨씬 더 재밌을 그런 나이였다.


 나이가 들면서. 아니 시간적 여유가 많아지면서 일까. 이제는 아름다움을 온전히 느낀다.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리며 내는 바스락 소리를 들을 때나, 사진으로만 보던 그림을 실제로 보았을 때 미처 담기지 못했던 그 색감에 감탄할 때면 가슴속 깊은 곳부터 저릿해짐을 느낀다. 미학을 몰라도 알 수 있었다. 아름다움을 느끼는 건 기다림이 필요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저 집중해서 가만히 바라보는 거다. 충분한 시간을 주면 세상은 저마다 가진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헤로데스 아티쿠스에서 베르디의 리골레토를, 빈 오페라하우스에서 몬테베르디의 율리시스의 귀환을 봤다.


 클래식 음악을 듣기 시작한 건 유럽 여행을 다니면서부터다. 길거리에서도 플루트나 바이올린 연주를 흔히 들을 수 있었고, 버스킹 하는 사람들은 대중음악이 아닌 성악곡을 불렀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피렌체의 어느 작은 광장에서 들었던 첼리스트의 솔로연주였다. 광장은 적당한 울림을 만들었고,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진심 어린 박수를 건넸다. 종종 공연장을 찾기도 했다. 유럽은 클래식 공연의 가격이 비싸지도 않고, 저렴한 입석 티켓도 있어서 클래식을 접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한국에 돌아와서는 엄두가 나지 않았다. 찾아보지도 않고서 한국에서 클래식 공연을 보려면 20만 원? 30만 원은 줘야 하지 않나,라고 생각했다. 클래식 FM 라디오를 들으면서, 유튜브로 공연 영상을 찾아보면서 나는 아쉬움을 달랬다. 그렇게 임윤찬의 라흐마니노프 피아노협주곡 3번 연주 영상을 보았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음악을 들으면서 눈물이 나는 경험은 처음이어서 당황스러웠고, 공연장에 가서 연주를 듣고 싶다는 생각이 더 간절해졌다.


 문득 지역마다 오케스트라를 운영한다는 것이 생각났다. 시에서 세금으로 운영하는 거라면 합리적인 가격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나는 부산시립교향악단의 홈페이지에서 정기공연의 좌석별 가격을 확인했다. 아니, R석이 2만 원 밖에 하지 않는다니! B석은 5천 원 이면 볼 수 있었다. 그 얘기를 했더니 그의 얼굴도 밝아진다. 우리 둘 다 클래식은 현장에서 감상해야 한다는 걸 알아버렸고. 해외여행을 가지 않는 이상 국내에서 볼일은 없지 않을까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가장 가까운 날짜의 공연은 거의 매진이었다. 위치가 그리 좋은 않은 곳의 표만 남아 있었다. 우리는 남아있는 B석 티켓을 예매했다. 공연당일, 조금 일찍 도착해서 공연장을 둘러보았다. 부산문화회관은 왠지 세종문화회관과 비슷한 외관이었다. 한국화 된 그리스 양식 건물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건물 3개가 나란히 서있었다. 찾아보니 1988년에 개관했다고 한다. 부산시립교향악단은 그보다 더 오래된 1962년에 창단되었다. 생각보다 역사가 깊은 곳이었다.


 예술의 전당 앞에 백년옥이 있듯이 부산문화회관 앞에는 공원칼국수가 있다. 이곳은 줄 서서 먹는 맛집으로 물총칼국수와 수육 그리고 만두를 팔았다. 수육과 만두 둘 다 맛보기 메뉴가 있었다. 그러고 보니 부산에는 대체로 맛보기 수육, 맛보기 순대 같은 맛보기 메뉴를 파는 것 같다. 양이 작은 우리에게는 매우 만족스러운 구성이다. 문화회관 주변에는 공원칼국수 말고도 문화쌈밥집 그리고 문화회관과 어울리는 이름의 경양식집 모짜르트도 있다. 공연을 볼 때마다 주변 맛집을 하나씩 돌아보는 즐거움도 있는 것 같다.


 이날은 프로코피예프 바이올린 협주곡 2번과 라흐마니노프 교향곡 2번이 연주될 예정이었다. 공연이 시작되고, 낮은 현의 떨림이 들려왔다. 이게 너무 그리웠다. 다른 악기보다 특히 현악기 소리는 음원과 현장의 차이가 큰 것 같다. 라흐마니노프 교향곡 2번 3악장이 시작되자 몸이 녹아내리는 것 같다. 그래, 이걸 들으러 여기 온 거지.


 회사를 그만두고 버는 것 없이 가진 돈을 쓰는 삶을 살고 있다. 많지 않은 돈으로 한 달을 꾸려나가야 하기 때문에 이제 우리에게 문화생활 같은 건 거리가 먼 일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곳 부산에서 우리는 저렴한 가격으로 클래식 공연도, 영화도, 스포츠도 보면서 살고 있다.


 3월에 엄마가 부산에 내려온다. 엄마랑 같이 보려고 큰맘 먹고 선우예권과 연광철 듀오 콘서트를 예매했다. 최대 2만 원을 넘지 않는 공연만 보다가 무려 4만 원짜리 좌석을 결제한 것이다. (부산문화회관 유료회원 할인을 받아 31,000원을 주고 결제하긴 했다.) 비싼 공연을 결제하며 그에게 물었다.


 “공연에 최대 얼마까지 쓸 수 있어?”

 “글쎄, 6만 원? 그런 건 네가 정해.”


 나도 임윤찬 리사이틀이 보고 싶었다. 6월에 대구에서도 한다는데, 부산에서 갈만한 거리인데. 가격을 보니 R석 12만/ S석 10만/ A석 7만/ B석 5만 원... A석 정도는 도전해 볼 만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그러던지,라고 말하면서 네가 티켓 예매에 성공할리가 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예매 전쟁에 참여해 보고 깨달았다. 가격이 문제가 아니었다. 정말 빛의 속도로 티켓이 사라졌다. 좌석을 선택하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려고 하면 누가 선택한 좌석이라는 알람이 떴다.


 한국에서 티켓 구하기를 포기하고 일본까지 원정 공연을 다니는 사람들도 있었다. 일본에서 열리는 리사이틀은 우리나라처럼 경쟁이 치열하지 않아서 마음만 먹으면 티켓을 구할 수 있는 것 같았다. 게다가 가격도 조금 더 저렴했다. 부산에서 일본 가까운데. 남편 우리도 일본 좀 다녀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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