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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생활 예행연습이 된 재택근무

by idle

이직 후 한 달에 백만 원 이상은 더 저축할 수 있었다. 월급이 올라서가 아니다. 야근 수당을 많이 받았기 때문이다. 입사 전 이 회사에 대해 들었던 이야기는 ‘일은 재미없을지 몰라도 워라벨은 좋아’였다. 역시 같은 회사라 해도 모든 부서가 같을 수는 없다. 사주에 일복이 많다 했는데, 정말 그랬다. 내가 가는 곳은 항상 일이 많았다. 남편은 이쯤 되면 네가 일을 벌이는 거 아니냐고 의심을 하기 시작했다. 회사가 멀어져서 퇴근 후 집에 오면 하루가 지나있었다. 아침에 출근해서 다음날 집에 오는 일들이 반복되었다.


전 직장에서 이직을 할 때도 결정적인 이유는 ‘사람’ 때문이었다. 일 때문에 받는 스트레스는 극복할 수 있는데 나와 잘 맞지 않는 ‘사람’으로 부터 받는 스트레스는 극복하기 힘들었다. 나이가 들면 무뎌질 줄 알았는데, 나이가 들수록 더 견디기 힘들어졌다. 그건 아마 내 성향 때문일 거다. 난 화를 잘 내지 않는 편이다. 다툼이 발생해도 ‘내가 조금만 노력하면, 내가 조심하면 달라질 수 있어.’라고 속으로 삼킨다. 그건 착해서가 아니다 나를 위해서였다. 남들에게 화풀이를 한 적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이후가 난 더 힘들었다. 내가 참느냐, 화를 내느냐 둘 중에 무엇이 덜 힘들지 고민하다 내가 선택한 방법일 뿐이다.


이직 후 난 승진을 했고 연봉도 더 많이 올랐다. 회사에서 인정받기 시작했고, 함께하는 팀원들도 생겼다. 하지만 인정을 받을수록 속으로 삼키는 내 버릇 때문에 더 힘들어졌다. 다시 그 증상이 나타났다. 식은땀이 흐르고 숨을 쉴 수 없는 증상과 두통. 최소 3년은 더 일하고 싶었는데, 다시 퇴사하고 싶은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남편과 난 회사에서 힘들었던 얘기는 잘 꺼내지 않는다. 그냥 “오늘 매운 거 먹고 싶다.”, “오늘은 소주 한잔 할까?” 하면 그날은 힘든 일이 있었구나 짐작할 뿐이다. 무슨 일 때문에 힘들었는지도 서로 묻지 않는다. 쓸데없는 농담을 한다거나, 은퇴 이후 뭐할지를 얘기하며 힘든 일을 잊게 해 주려 노력한다. 팀원 때문에 몹시 속상했던 날이었다. 평소에는 양꼬치에 칭다오를 마셨는데, 그 날은 소주를 마셨다.

“남편, 20년 6월이면 대출도 다 갚고 목표 금액도 다 모으겠어. 6월에 나도 그만둘까?”

“넌 나 퇴사하고 6개월 이후에 그만둬야지.”

“목표 금액 다 모았는데?”

“그럼, 6월 이후에 네가 번 돈은 생활비만 제외하고 다 너 용돈으로 가져.”

솔깃한 제안이었다. 일할 수록 내 비자금이 더 쌓인다. 좀 더 버텨보기로 했다.


남편이 퇴사를 결심했던 20년 3월부터 코로나가 매우 심각해졌다. 재택근무가 시작되었다. 남편은 회사에 퇴사를 말했고, 마지막 근무일이 정해졌다. 드디어 그의 가정주부 생활이 시작되었다.

내가 재택근무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린 하루 종일 집에 같이 있었다.

“은퇴가 아니라 그냥 주말이 계속 이어지는 것 같아.”

가정주부를 하면서 그가 기대했던 나의 출근 이후 여유로운 아침 시간은 없었다.

“아휴 삼시세끼 밥해 먹이느라 허리가 휘어. 그냥.”

남편이 투덜거렸다. 출근을 하지 않으니 생활비가 많이 줄었다. 은퇴 후 계획했던 생활비 정도만 쓰고 있었다.

“재택근무하는 동안 은퇴 예행연습 한번 해보자. 계속 은퇴 생활비만큼만 쓰는 거지.”

재택근무는 생각보다 길어졌다. 생활비를 평소보다 많이 줄였는데도 힘들다는 생각이 별로 들지 않았다. 부족할까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충분한 금액이었다.


목표 금액은 달성했기 때문에 언제든 퇴사를 말해도 되는 상황이 되었다. 언제든 그만둘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인지 마음이 가벼워졌다. 코로나로 인해 경제상황이 어떻게 나빠질지 모르니 회사를 좀 더 다녀야 하나 고민도 되었다. 대출은 다 갚았고, 은퇴 후 생활비로 살고 있었기 때문에 나의 비자금도 꽤 모이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회사에서 불합리하다고 여겨지는 일들에 대해 큰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난 곧 그만 둘 생각을 하고 있으니 남아 있는 사람들을 위해 하나라도 더 개선해 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당연히 한 사람의 목소리로 달라질 회사가 아니었다. 큰 소리를 낸다 해서 내 스트레스가 줄어드는 것도 아니었다. 나의 불안증세는 계속되었다.


진행 중인 프로젝트가 마무리되어갈 무렵 새로운 프로젝트에 대한 얘기가 시작되고 있었다. 지금이 아니면 다시 기회가 없을 것 같았다. 새로운 프로젝트에 들어가면 난 분명 끝날 때까지 말하지 못할 것이다. 고민 끝에 회사에 퇴사를 하겠다는 말을 꺼냈다. 회사는 당장 퇴사보다는 휴직을 권했다. 쉬다 보면 내 불안증세도 좋아질 것이고, 다시 일하고 싶어 질 거라 했다. 휴직도 나쁘지 않았다. 쉬면서 내가 은퇴 생활에 맞는 인간인지 다시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휴직을 하기로 하고 마지막 근무일이 정해졌다. 난 남편에게 약속했던 6개월을 지키지 못했다.

은퇴를 했다. 평일에도 카페에서 여유로운 시간을 즐길 수 있었다. 꿈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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