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면 단풍이요, 단풍 하면 내장산이라 들었다. 단풍철이 되면 어마어마한 사람들이 몰려든다는 그곳. 그래도 단풍 절정시기를 비켜 간다면 여유롭게 즐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포털에서 ‘단풍 절정시기’를 검색했다. 11월 7일이 내장산 단풍 절정이란다. 일요일이다. 그다음 날부터 며칠간은 비 예보가 있었다. 우리는 내장산의 단풍이 절정을 맞이하기 전 그곳을 찾기로 했다.
근처 맛집을 미리 찾아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난 맛집을 찾는데 너무나 열정적이었다. 그리고 ‘송명섭 막걸리’도 꼭 마셔보고 싶었다. ‘송명섭 막걸리’는 막걸리 좀 먹는다 하는 사람들이 최고의 막걸리로 손꼽는 술이었다. 전통 술 담그기 무형문화재 송명섭 명인이 만든 막걸리. 막걸리계의 평양냉면, 막걸리계의 아메리카노 등으로 불리는 슈퍼 드라이한 막걸리. 그러니 정읍을 간다는데 송명섭 막걸리를 마시지 않을 수 있겠는가.
빛이 좋아야 단풍의 색도 더 곱게 보이는 법인데 다행히 날이 좋았다. 정읍에 도착한 우리는 내장산보다는 점심부터 먼저 먹기로 했다. 우렁쌈밥 정식으로 유명한 ‘국화회관’. 점심시간을 피해서 갔는데도 대기가 있었다. 텅 빈 시내 거리에서 이 식당 앞에만 사람들이 서성거렸다. 20분쯤 기다렸을까. 드디어 대기명단에 적어둔 내 이름이 호명됐다. 우리는 우렁 백반정식 2인분을 주문했다. 먼저 반찬이 깔리고 잠시 후 우렁 초무침과 우렁쌈장, 청국장과 쌈채소가 차려졌다. 이곳의 청국장은 특유의 냄새가 나지 않으면서도 구수하고 담백했다. 우렁쌈장 역시 짜지 않고 재료의 깊은 맛이 났다. 보통 전라도 하면 남도 음식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남도 특유의 젓갈 맛이 강한 음식들. 하지만 북도의 음식은 남도와 많이 달랐다. 자극적이지 않고 깔끔한 맛이다.
“너무 맛있다. 음식 때문에 정읍에 살고 싶을 정도야.”
“난 익숙해, 우리 큰엄마가 해주던 맛이야.”
뭐라고, 이 식당이 특별히 맛있는 게 아니라 정읍의 일반 가정에서는 보통 이 정도는 먹고 산다는 말인가. 난 이 식당의 맛 때문에 정읍으로 이사 와야겠다 생각했는데 그냥 일반적인 맛이라니. 그가 내가 한 음식을 먹을 때 두려워하는 이유를 이해했다. 우리는 평소보다 많은 양의 음식을 해치웠다. 배가 불렀지만 내장산에 오르면 이 정도는 금방 소화될 테니 괜찮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정읍 시내부터 단풍이 예사롭지 않았다. 내장산과의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단풍나무 가로수의 빛이 더 고왔다. 점점 더 붉은 빛깔의 단풍나무가 터널을 이루며 내장산 주차장까지 이어졌다. 주차장 진입로는 이미 많은 차들이 줄 서 있었다. 도로 양쪽에는 인도가 있었고, 길가의 단풍도 좋았기에 우리는 거리가 먼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걷기로 했다. 단풍을 보기 위함이니 내장산까지 빨리 갈 필요는 없었다.
내장산 주변은 온통 축제 분위기였다. 여기저기 품바 음악 소리가 들려오고 어르신들은 덩실덩실 춤을 추며 걸었다. 사람이 많고 시끄러운 걸 좋아하지 않는 편이라 발걸음이 빨라졌다. 내장사로 오르는 길, 사람들은 길게 줄지어 걸었다. 끊어지지 않고 길게 이어지는 줄. 은퇴 전 평일의 한가로운 나들이를 그토록 바랬건만 오늘은 실패라고 생각했다. 내장산의 단풍은 아름다웠지만, 난 동네 호수와 아파트 단지를 한가롭게 거니는 산책이 더 간절해졌다. 하지만 “아직 절정도 되기 전 평일이 이런데, 주말은 장난 아니겠다.”라는 그의 말에 그냥 이 상황을 있는 그대로 즐겨보기로 했다. 돌아보니 길게 이어진 줄도 붉은 등산복으로 물들어 있었다. 나무 위도 아래도 알록달록 하다. 소녀처럼 꺄르르 웃으며 친구들과 사진을 찍는 아주머니들. 마스크로 가려 보이진 않지만, 웃는 소리가 가득하니. 지금 이곳에 슬픈 사람은 없을 것만 같았다. 내 마음도 흐뭇하게 물들어갔다.
내장산을 내려와 태인의 백학정에서 떡갈비를 먹기로 했다. 정읍 시내에서는 송명섭 막걸리를 팔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막걸리는 정읍에서도 태인에서만 판다고 했다. 맛집을 찾다 보니 떡갈비가 맛있다는 백학정에서 송명섭 막걸리를 마셨다는 후기가 있길래 이곳으로 정한 것이다.
떡갈비 정식을 주문했다. 은퇴 후 잘 먹지 않은, 무려 한우로 만들어진 떡갈비. 정식 1인 분에 32,000원이니 둘이 먹으면 64,000원이다. 최근 우리가 한 외식 중에 최고가의 식사다. 막걸리도 주문하려 했다. 하지만 이곳에서도 송명섭 막걸리는 팔지 않았다. 유통기한이 짧아서 식당에서 취급하지는 않고, 근처 가게에서 사 오면 잔을 제공해주겠다 한다. 그가 옷을 챙겨 입고 나가서 막걸리를 사들고 오기로 했다. 난 그를 기다리며 테이블이 없는 빈 방에 앉아 있었다. 잠시 후 한상 가득 차려진 교자상을 내 앞으로 가져다주었고, 그도 곧 양손에 막걸리를 들고 나타났다.
이 정식에도 청국장이 나왔는데, 나에게 감동을 주었던 우렁쌈밥집의 청국장 맛과 비슷했다. 아, 정읍의 맛은 정말 다 이런 것인가! 청국장뿐 아니라 떡갈비와 반찬 하나하나 맛없는 게 없었다. 보통 정식을 시키면 손이 가지 않는 반찬도 있고, 음식도 많이 남기기 마련인데, 이곳은 그럴 일이 없을 것 같았다.
음식에만 감탄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송명섭 막걸리를 마셔야 했다. 그와 건배를 하고, 한 모금 들이키는 순간 알았다. 왜 이 막걸리가 막걸리계의 평양냉면으로 불리는지를. 첫 모금은 좀 밍밍한가 싶더니만 여운이 오래 남았다. 달지 않고, 청량감도 없다. 신 맛은 과하지 않고 깔끔하다. 다음 잔을 부르는 맛이다. 평양냉면과 아메리카노를 좋아하는 우리는 이 술이 매우 만족스러웠다. 그래서 식당을 나와 근처 마트에 들려서 남아 있는 송명섭 막걸리 4병을 모조리 사들고 왔다.
집으로 돌아와서 사들고 온 송명섭 막걸리와 어머님이 담가주신 열무김치를 꺼냈다. 그리고 놀이방으로 가서 TV를 켜고 스포츠 채널로 돌렸다. LG와 두산의 플레이오프 경기 결과를 보기 위해서였다. 결과는 두산의 승리! 기대하지 않았던 한국시리즈 진출이었다. 왜 계속 잘하는 건데! (한국시리즈에서는 4연패 했지만 그래도 대단!) 그와 나들이하느라 보지 못했던 경기 주요 장면을 보면서 함께 막걸리를 마셨다. 일상의 행복. 별다를 게 없다. 그와 함께 TV를 보면서 내가 왕년에 인기 좀 있었지 따위의 쓸데없는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술 한잔 기울이는 것.
내장산의 단풍이 특별히 곱고 아름답긴 하지만, 동네의 단풍을 즐기는 것 또한 내가 좋아하는 일이다. 조용한 산책길에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천천히 걷는 것 말이다. 어디서든 현재에 충실하며 내가 가진 것의 아름다움을 느끼면 그때 행복을 느낀다. 그래도! 우렁 쌈밥과 송명섭 막걸리를 먹기 위해서 정읍을 다시 찾을 것이다. 그건, 거기서만 먹을 수 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