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이두 Jul 21. 2024

엄마가 해외 한달살이에서 얻은 것들

나이 40이 되어가는 즈음에 겨우 깨달은 것

  책꽂이에서 앨범을 꺼내 들춰보듯, 올해 초 2월의 기억을 끄집어내 되살려본다. 본래 여행 다녀오면 추억을 팔고, 경험도 파는 게 제맛 아니던가.

  

  말레이시아에서 남자아이 둘과의 한달살이. 중요한 건 부딪히는 마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여행 기간과 목적지를 심사숙고하며 정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왜일까? 물 건너 국경을 넘어 나가면 알 수 없는 모험정신이 솟아오르는 나였기에 이번에도 역시 근원 모를 자신감이 마음 밑바닥에 깔려 있었다.


  온갖 어려움 겪으며 해외로 돈 벌러 나가는 것도 아니고, 등 떠밀어 누가 가라고 억지로 보낸 것도 아니다. 멋모르는 애들은 한국이든 타지 어디에서든 좋았을 것이다. 남편도 해외여행에 큰 관심이나 흥미가 있는 쪽도 아니다. 내가 추진하고 계획하여 우리 가정의 마이너스 통장과 엄마 돈을 써가며 (돈이 부족해 상당금액을 엄마에게 지원받았다.) 고생하는 거다. 그것도 말 안 통하는 외국땅에서.


  평상시엔 스스로 느끼기에도 무서우리만치 안정감을 추구하는 성향이지만, 여행에 관해서라면 무모하기까지 한 기질이 나란 인간의 내면에 숨겨져 있다.

 일례로 20대 중반에 친구와 단 둘이 인도여행을 간 적이 있다. 문제는 인도가 얼마나 위험천만할 수 있는지 사전조사도 하지 않고 갔다는 점이다. 친구와 나는 밤중에 다른 도시로 이동하려 야간행 기차 2인용 침실칸에 들어가 문을 닫으려는 찰나였다. 그 틈을 타고 우리 칸으로 한 남성이 난입하려고 했던 위험천만한 순간이 떠오른다. 그 자를 못 들어오게 문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다 겨우 문고리를 걸어 잠겄던 일은 두고두고 내 삶 속에서 회자될 것이다. 인도에 가기 1년 전에는 혼자 영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런던에서 처음 보는 낯선 외국인들을 만나 버스로 2주 동안 유럽 횡단을 하며 네덜란드 홍등가를 구경해 보고, 스위스 어느 산골 강물에서 래프팅을 하며 자청하여 입수도 해 보았다. 나이 40이 다 되어가는 지금 생각해 보면 정신이 번쩍 들만한 일들이다.




  이번에도 처음 시작은 무모함에 가까웠다. 나는 애 둘을 데리고 영어권 나라에서 1년 살다오기를 하고픈 소망이 있었다. 그리고 남편에게 지나가는 말로 전달했다. 되면 땡큐고, 아니면 말고. 다른 남편을 만났더라면 세 모자는 지금쯤 영어권 나라에서 살고 있었을 수도 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지만 내 남편은 극단적으로 현실적인 T 성향이다. 그는 한껏 감성적인 기대감에 부풀어 이미 마음은 미국에 가 있는 아내에게 가기 힘든 이유를 나열하였다.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안 될 가능성을 생각해 봐, 일단 너무 멀고 시차도 커서 내가 전혀 도움을 못 줄 수 있어. 혹시라도 사고가 난다거나 애들이 아프면?"

  "집값과 물가가 너무 비싸. 거기에 학비까지, 1년이면 1억 넘게 들걸."

  "애 둘 데리고 외국에서 1년 사는 거 너무 힘들 거야."


   비상 상황 혼자 대처하고, 힘든 거 감당할 자신은 있는데 돈 앞에서 작아졌다. 그래. 1년에 1억을 태울 용기와 깡이 나한테는 없었다. 1년은 좋을 것 같은데, 왠지 1년 후에 후회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갑자기 사라진 소망에 풀 죽어 있는데, 남편이 솔깃한 제안을 했다.

  "미국에서 1년 살기는 여러모로 힘들지만, 대신 조금 가까운 나라에서 한 달 살기는 어때? "

 이 미끼를 놓칠 내가 아니었다. 이거다! 호재를 외치고, 나는 곧바로 작전수행에 돌입했다. 먼저 행선지를 고민했다. 인터넷과 책, 카톡 단톡방에서 말레이시아 조호바루 도시에 대한 정보를 쉽게 구할 수 있었다. 바다와 휴전선으로 둘러싸인 대한민국에서 오가기에 비교적 적당한 거리, 가용 금액 범위 내에서 세울 수 있는 예산, 안전한 치안, 국제학교 환경과 레고랜드 체험을 고려해서 말레이시아 조호바루로 정했다.


  가기 전, 한 달 살기의 목적은 아이들의 다양한 체험 및 약간의 영어실력 향상이었다. 한마디로 아이들을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말레이시아에서 시간이 흐르면서 깨달았다. 나도 성장기 아이들만큼 많이 흡수하고, 그릇이 더 넓어졌다는 것을.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기도 했다. 엄마의 그릇이 넓어지고 있다는 것을.


   한 달 살기를 하고 와서 처음 대하는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졌음을 느낀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에게 일종의 경계를 가지고 낯가림을 탔던 나였다. 하지만 타국에서 애 둘을 데리고 다니면서 경계와 낯가림은 거추장스러운 보호막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약간의 용기로 보호막을 깨부수니 내 눈앞의 사람을 편하게 생각할 수 있는 지혜가 생겼다. 편해지니 말도 술술 나오고, 대화가 오갈수록 재밌었다. 이동수단이 없는 그들을 태우고 여기저기 돌아다녔던 경험이 기억난다. 신기한 건 어색하거나 불편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같이 말벗이 돼줄 사람이 있어, 먹을 것 한 점을 나누어 먹을 사람이 있어 고마웠다.


   한달살이 왕복 비행기가 모두 같았던 가족이 있었다. 인천에서 출발할 때는 모르던 사이였던 그들이, 인천으로 올 때에는 부둥켜안아주며 서로 수고했다고, 대단하다고 말해주었다.


   여행에서 만난 사람들은 삶에 대한 가치관이 비슷한 걸까? 대화가 통한다. 그래서 그런지 나의 삶의 가치관에 대한, 알고 있던 지인에게 쉽사리 할 수 없는 미래 계획에 대한 속 깊은 얘기도 쉽게 말할 수 있게 된다.


  말레이시아에서의 한달살이는 엄마, 두 아들 모두를 위한 성장의 시간이었다.


   

말레이시아 한달살기때 마지막 밤 숙소에서

  

  

이전 09화 애 둘을 데리고 Miss 소리를 듣다니,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