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오만 섬 여행기 2부
Mersing 항에 도착하니 우리처럼 차를 끌고 온 일행이 상당히 많다. 배 타러 갈거라 했더니 관공서 느낌이 나는 건물의 주차장으로 안내한다. 토요일이라 그런가 싶다. 섬 여행에 미키마우스와 도널드덕 목베개를 가져가야 할까 싶지만 우리 아이들에게는 무척이나 소중한 존재다. 팔엔 인형을 끼고, 목에는 목베개를 두르고 항구 앞에서 기념사진을 남긴다.
9시 출항에 8시 30분에 도착하여 사진도 찍고 여유를 누리며 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차례가 되어 아무 생각 없이 모바일 예약내역을 보여주니 길 건너 매표소에서 발권을 하고 와야 한단다. 아뿔싸. 사진을 찍을 때가 아니었는데, 표로 바꿔야 한다는 사실을 왜 망각하고 있었을까. 국내도 아닌 해외에서 말이다. 이제 한 달 살기 끝무렵이라고 긴장의 끈을 놓아버렸나 보다. 트렁크 끄랴, 아이들 진두지휘하랴, 정신없이 매표소에 다녀오니 다행히 배는 떠나지 않고 사람들은 계속 기다리고 있었다. 대기줄에 합류하여 무사히 승선했다. 사실 티오만 섬으로 가는 배가 두 종류가 있었는데 정확히 확인도 안 하고 탔다. 이 배가 아니면 나를 안태웠겠지 하면서, 배짱 두둑하게 눈앞의 배에 올라탔다.
항구를 떠나 10분쯤 지나니 망망대해 위 우리가 타고 있는 배 한 척만 남았다. 머리 끄트머리에 있는 창문으로는 주변 경치를 감상할 수도 없었고 엔진소리는 귀에 거슬렸으며 일렁이는 파도에 몸을 맡기고 있자니 뱃멀미가 올 것만 같아 잠을 청했다. 에너지 넘치는 내 옆 두 아이들은 기다리고 인내하다 결국 디즈니플러스의 도움을 받았다.
어느덧 섬의 형태로 보이는 거대한 풍경이 시야에 나타났다. 우리가 내릴 선착장은 4개의 선착장 중 가장 먼, 맨 마지막 선착장이었다. 선착장 간 거리가 가까울 것이라고 생각해서 금방 내릴 수 있겠다는 예상은 착각이었다. 처음 선착장에서 사람들이 내린 후 1시간 정도가 지나서야 우리가 내릴 수 있었다.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지고 마지막으로 내리려는 몇몇 사람들만 배에 남았다. 우리는 도대체 언제 내리냐는 아이들의 핀잔을 들으며 드디어 땅을 밟았다. 당장 숙소에 가서 이 트렁크를 맡기고 돌아다녀야 하는데 누군가 내 영어이름을 부른다.
"GRACE"
설마 했는데 나를 부른 것이었다. 알고 보니 앱에서 내 영어이름으로 숙소 예약을 했고 숙소 주인장은 마지막 선착장에서 내리는 몇 안 되는 사람들 중 내가 그레이스라고 짐작했던 것이다. 나를 보자마자 싱가포르에서 왔느냐고 묻는다. 아니야, 한국인이야, 했더니 허허 웃는다. 한국인일 줄은 생각 못했다면서.
티오만 섬에서는 오토바이 옆에 짐칸을 만들어 그 안에 짐을 싣는 용도로 쓰는 것 같았다. 우리 셋은 이미 지쳤으므로 그 짐칸에 올라탔다. 주인의 처남은 좁고 구불구불한 길을 신기하게 잘 운전했다. 베테랑이었다.
숙소는 섬 끝에 있었고 아담하게 장식한 입구 안에는 독채의 방이 여럿 줄지어 있었다. 틈틈이 뚝딱뚝딱 나무질과 망치질을 하는 주인 부부의 남편 모습으로 미루어 보아 우리가 묵고 있는 방도 그 주인장이 직접 만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방이라고 해 봐야 침대 두 개, 화장실 칸, 화장대 한 개가 전부였다. 외벽에는 도마뱀이 기어 다니는 야생 속 임시 거처였다.
"혹시 스노클링 할 수 있게 배를 태워 줄 수 있나요?"
트렁크를 풀어 수영복으로 갈아입자마자 주인에게 물어봤다. 여기에 온 이유는, 특히나 이 구석진 마지막 선착장에 온 이유는 스노클링 하기에 아주 예쁜 무인도 섬과 바다가 근처에 있기 때문이었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스노클링을 할 수 없다는 대답을 들었다. 뱃사공인 자신의 장인어른에게 요청해 보는 듯 지만 시간이 너무 늦고 배를 탈 사람이 우리 셋 말고는 없어 불가하다고 했다. 한창 대낮인데 늦은 시간이냐고 되묻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배를 탈 수는 없을 것 같아 포기하고 섬 구경을 하기로 했다.
말레이시아에서는 맥주를 정해진 곳에서만 구할 수 있다. 종교에 의해 엄격하게 규제하는 나라였다. 웬만한 구멍가게에서는 팔지를 않는다. 꽁꽁 숨겨놓은 보물을 찾고 싶은 심정이 이런 것일까? 후덥지근한 날씨에 맥주 생각은 간절했고, 어디로 가면 맥주를 살 수 있다는데 그 목적지는 여러 사람에게 물어 찾아도 나오지 않으니 더 오기가 생겼다. 맥주는 한 숙소에서 팔고 있었다. 티오만 섬 살랑 선착장을 중심으로 숙소와 음식점, 가게들이 해변을 따라 길게 늘어져 있는데, 우리 숙소가 끝이라면 맥주를 파는 숙소는 다른 끝 지점이었다. 마치 생명수를 구하는 사람처럼 맥주 있냐고 물어보니 큰 드럼통에서 시원한 Carlsberg를 한 캔 꺼내어 준다. 돈을 지불하자마자 바로 따서 벌컥벌컥 마시며 맥주가 주는 낭만과 여유로움에 취했다.
마당에 풀어놓은 강아지처럼 해변에서 잘 노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나무의자에 걸터앉아 맥주를 마셨다. 회상하고 있는 지금도 그 순간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다.
시냇가에서 엉금엉금 기어 다니는 악어, 나무에 쪼그리고 앉아있는 원숭이들, 수풀을 지나다니는 도마뱀들을 신기하게 쳐다보며 밀림에 사는 타잔과 제인이 생각났다. 그들이 그리 심심하지 않았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숙소에서 다시 디즈니 플러스의 도움을 잠시 받아 충전 후 저녁을 먹으러 나왔다. 도처에 자리하고 있는 길고양이들을 곁에 두고 볶음밥 두 접시를 세 명이서 비웠다.
소화를 시킬 겸 선착장 주변을 걷고 있는데 아까서부터 봤던 남자가 갑자기 말을 건다.
"Hello, Miss. Nice to meet you. Are you from Singapore? "
인상이 선하게 보이는 그 남자가 위협적으로 느껴지진 않았다. 내 주변을 맴돌고 있는 두 아이들을 봤으면 내가 Miss는 아닌 것을 직감할 텐데. 관례상 Miss라고 불러준 것일까? 어쨌든 젊게 봐주니 싫지는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남자가 말을 걸어오는구나, 남편이 없다고 생각한 것일까? 혼자 속으로 온갖 상상을 하며 그 남자와 몇 마디 나눴다. 재밌는 에피소드로 기억에 남아있다.
어둠이 지니 술을 거의 안 마시는 사람들 답게 다들 숙소로 들어가 밖은 적막해진다. 숙소 프런트도 일찌감치 불을 끄고 휴식에 들어간 모양이다. 어둠 속에 누가 반갑게 인사를 하길래 봤더니 숙소 주인 부부의 아내가 아이를 데리고 본래 거처로 가는 모양이다. 드디어 그들에게 찾아왔다는 아이의 손을 꼭 붙잡고서. 하루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모자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한여름에 선풍기로만 버틴 밤이었다. 그마저도 다음날 새벽 6시에 일어나야 해서 쉽사리 잠이 오지 않았다. 이 외딴곳에서 남편 없이 나와 아이 둘만 자고 있다는 사실도 믿기지 않았다. 나와 아이들은 생각보다 강했고 모험가 체질이었다. 덥고 습한 바닷바람과 함께 눈을 잠시 붙이고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아이들을 깨워 선착장으로 향했다. 주인 부부에게 인사도 못한 채 서둘러 황급히 나왔다.
해 뜨는 광경을 배에서 지켜보다 보니 어느덧 항구에 도착해 있었고, 우리는 다시 조호바루로 향했다. 다시 와보지 못할 것만 같은 여행 장소에 가면 이 장소의 모든 것들과 이별을 고하는 것만 같은 감상적인 기분에 빠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