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투잡러이다. 공립 초등학교 교사는 겸직이 금지되어 있지만 기꺼이 투잡을 뛰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 집 밖에서는 교사모드 작동, 안에서는 엄마모드가 24시간 내내 풀가동 중이다.
풀가동 스위치가 꺼지는 시간은 모두 잠든 이른 아침 혹여나 누군가 깰까 조심스럽게 키보드를 두드리는 지금 이 순간이다. 이마저도 잠에서 깬 부스스한 얼굴로 그중 한 명이 다가오면 미련 없이 노트북을 닫는다.
교사 생활을 지속하는 한, 내 자식들이 품에서 떠나기 전까지는 시간, 장소, 상황에 맞게 최적화된 모드로 버퍼링 없이 변신해야 하는 것이 나의 숙명이자 사명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학교에서 26명 아이들 앞에서 목의 핏대를 세우며 열변을 토하고 있다가도 문득 내 배 아파 낳은 아이들이 아른거린다. 무사히 등교는 했을까, 학교에서 친구에게 야무지게 말 한마디는 잘하고 있을까 생각한다.
그런가 하면 집에 돌아와 오늘 하루 동안 떠올렸던 내 아이들을 가만히 보고 있다가도 습관처럼 아까 대했던 학교 아이들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오늘 이런 말을 해줬어야 하는데, 기습적인 학생의 발언에 이렇게 능수능란하게 대처했어야 하는데, 아쉬움과 후회를 반복한다.
머리를 한 대 쥐어박아 생각을 멈출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할 텐데.
옆반 선생님 아들이 엄마 교실에 얼굴도장 찍으러 올 때면 “좋겠다. 민수는 학교 끝나고 엄마 얼굴 한번 보고 학원 가니까.” 라며 쓸데없는 부러움을 내보인다. 마치 내 아이들을 다시 못 볼 것 마냥 애달픔이 솟구치는 마음으로 말이다. 쓸데없는 감성팔이라며 마음을 황급히 다잡는다.
이런저런 일 겪다 사지 멀쩡하게 퇴근할 때면 안도감과 함께 맥이 풀려 온다. 26명의 아이들과 씨름한 후 집에 돌아와 시든 풀잎처럼 축 늘어져 어느새 침대에게 드러누워 있다. 오늘도 애쓴 자신을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면 좋으련만, 오늘도 여느 때와 같이 학교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니, 이를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몸처럼 마음도 쉬자, 좀.
“왜 학교문제를 집에까지 끌고 오는 거야. 네가 할 도리만 해. 더한다고 월급 더 주는 것도 아니잖아”
세상 쿨하게 말하는 남편의 말에 괜한 멋쩍은 웃음만 짓고야 마는 사람. 어떻게 된 판인지 나라는 인간에게는 맺고 끊는 쿨함을 찾을 내야 찾아볼 수가 없다.
얼굴에 솜털이 뽀얗게 난 아이들을 오전에도 보고, 오후에도 보는 삶의 패턴이 나에게는 앞으로 적어도 십 년간 이어질 텐데 말이다.
아침에 애들을 깨우고, 후다닥 부엌으로 달려가 어제저녁 먹다 남은 미역국에 밥을 말아준다. 뜻밖에 기력이나 에너지가 솟으면 무려 아침 만찬인 오므라이스를, 만사 귀찮을 때는 모닝빵에 잼을 발라 눈곱이 끼고 까치집이 진 아이들 앞에 내놓는다. 9살 남자 쌍둥이들은 고새 잠이 깨서 식탁에 마주 앉아 장난을 치고 있다.
그 장난에 맞장구 쳐주는 척하다가도 시간의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기어이 내뱉는 말. “빨리 먹어.”
오늘도 다정한 콘셉트는 틀렸다.
우적우적 음식물을 입에 다 넣은 아이들을 보자마자 자동 반사적인 지시는 필수다. “옷 갈아입고 양치해.”
아, 출근 주차 후 자동차에서 눈감고 한숨 돌릴 순간이 벌써 기다려진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집에서 미리 누르고 나와 타이밍에 맞춰 탑승하고 나서야 아이들을 안아주고 싶은 마음이 샘솟는다.
“엄마한테 민준이 서준이가 최고인 거 알지? 하트 뿅뿅 사랑해.”
이 급격한 감정변화는 무어란 말인가, 어쨌거나 등교하는 아이들에게 몇 초간 사랑의 하트를 발사한다.
‘학교라는 작은 전쟁터에 나가는 아이들에게 기를 불어넣어 주고 자신감이 솟게 해줘야 한다.’라고 조언해 주신 교장선생님의 말씀을 새겨 들어 작년부터 인사말을 바꿨다. 교장선생님 사모님이 교육 컨설팅 사업을 운영하고 계신다기에 더욱 솔깃했다.
아침의 미션 수행이 끝나면 재빨리 학교로 향한다. 적재적소에 깜빡이 켜고 차선을 변경해 가며 엑셀과 브레이크를 밟는 실력이 나날이 늘어간다. 공간 부족으로 주차난이 심각한 우리 학교 주차장을 생각하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일단 차를 대고 봐야 한다. 학교 도착시간은 대략 8시 10분에서 15분. 주어진 시간에 문을 닫는 성문을 향해 촌각을 다투며 입성하는 심정이다.
8시 30분 출근시간까지 남은 시간은 겨우 15분 남짓이지만 그대로 교실로 향하기엔 어딘가 아쉽다. 일어난 순간부터 바쁘게 움직인 내 몸과 마음에 휴식시간이자 작은 선물을 주고 싶다. 길 건너 카페로 향해 최애 메뉴인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손에 쥐고 흐뭇하고 여유롭게 교실문을 드르륵 연다.
하지만 잠시뿐, 시끌벅적한 교실 속 아이들이 나를 맞이한다. 다른 반은 아침부터 개미 한 마리 지나가는 소리도 들릴만큼 조용하던데, 우리 반만 왜 유독 소란스럽고 정신없을까?
요즘 학생들은 교사가 아니라 학교 엄마라는 호칭이 더 익숙할 법하게 행동한다. 자리에서 “선생님”을 불러대며 본인의 요청사항을 말한다. 타고난 성향 자체가 카리스마와는 거리가 멀어 본의 아니게 편한 선생님으로 이미지가 굳어지는 중이다.
수업시간에 손을 들지 않고 자유롭게 말하는 아이들을 보며 ‘격식 없이 말하는 자유로운 토론 문화가 아이들의 수업 참여도를 높일 것이다.’라는 긍정회로를 돌린다. 요즘 디지털 교수 학습이다 뭐다 해서 패드 활용 수업이라도 하는 참이면 로그인이 되지 않는다, 와이파이가 끊긴다, 스마트 펜 인식이 안 된다 등의 아우성에 교실은 시장통을 방불케 한다.
그다음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이들이 무장 해제 되는 쉬는 시간. 왜 인간이 애써서 이룩한 직립보행에 역행하려고 하는 것일까, 네발로 교실 바닥을 기어 다니는 아이를 보면 별다른 말이 생각나지 않는다.
춤을 좋아하는 담임 탓에 틈나면 음악을 틀어달라는 아이들은 구슬땀이 머리카락에 맺히도록 몸을 움직인다. 에라 모르겠다. 나도 덩달아 같이 몸을 흔들며 어지러운 머리에 담긴 잡념들을 털어 낸다.
이 와중에 나름의 교육철학을 실천하기 위해 매일 그 달의 시를 외우고, 아침마다 책 읽어주기도 빼놓지 않는다.
아이들이 우르르 썰물처럼 빠져나간 오후가 되면 두시 반 퇴근 시간을 맞추기 위한 태세에 돌입한다. 교육 공무원이 아닌 일반 공무원으로 돌변하여 열심히, 빠르게, 사무적으로 주어진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 마우스와 키보드를 놀린다. 마음속으로 두 시 반 퇴근 만세를 외치며.(올해 7월부터 출산 육아 장려 정책의 일환으로 확대된 육아시간을 사용하는 중이다.)
칼퇴하는 시간이 빨리 오기를 기다리면서 집 현관문을 열면 아이들과의 만남이 한차례 더 성사된다. 그 아이들은 내 자식들이다. 오매불망 어미새를 기다린 아기새들 마냥 엄마 얼굴만 보아도 함박웃음 지을 나이다. 학교에서 띵해진 머리에 불안증세를 느끼며 곧바로 침대로 직행하는 엄마도 좋다며 졸졸 쫓아온다.
꼴까닥 새우잠을 자다가, 퍼뜩 일어나 하루의 막바지 일과를 수행하기 시작한다. 저녁식사에 국 메뉴는 사라진 지 꽤 되었고, 나와 남편의 두 어머니에게 공수받은 각종 밑반찬을 구원투수로 삼고 회심의 메인메뉴를 선발투수로 앞세운다.
메인요리를 내놓으려면 사전 작업이 물론 필요하다. 로켓처럼 다음날 새벽같이 배송된다는, 한번 발 들이면 끊을 수 없다는, 그 앱은 필수다. 재빨리 식재료를 스캔하고 장바구니에 담아 결제버튼을 누른다.
마음먹고 마트 가서 장 봐오기를 한지는 오래다. 퇴근 후 마트에 들러 여유롭게 식재료를 비교하며 골라 두 손에 낑낑대고 올 시간과 에너지는 나에게 사치다. 쇼핑 앱 관계자들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매일 아침 택배 상자를 뿌듯하게 열어재낀다.
요리만 끝내면 나머지 집안일은 남편의 몫이기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아이들 방으로 향한다. 2학년의 집중력은 원래 이렇게 짧을 것이라는 자기 암시를 계속하며 울화통이 터지지 않게 조심한다. 소리 지르는 순간 방전 될 것을 알기에 생각을 바꾸고, 말을 조심한다.
책 읽어주기를 잠자기 전 필수코스로 여기는 엄마의 영향으로 아이들도 리딩이 집착 수준에 다다랐다. 혼자 책 읽기는 싫어하면서 읽어달라고 얘기하는 것은 끈질기다. 이쯤 되면 체력은 거의 바닥이다. 목청을 가다듬고 부여잡고 간간히 잠꼬대를 해가며 책을 간신히 몇십 쪽 낭독하고 나면 투잡러의 하루도 어느새 마무리된다.
하루 일과를 주욱 나열하고 나니 다시 한번 느낀다. 나는 역시 모드 전환 힘들고, 우왕 자왕 하는, 쿨함 제로 투잡러이다.
마음에 들진 않지만, 어쩌겠는가, 투잡러 9년 차의 짬밥이 있는데, 그냥 그러려니 해야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