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년(停年)과 갱년(更年)

by 마정열

나이가 들면서 여러 신체적 변화를 실감한다. 그중 하나가 수면 패턴의 변화이다. 요즘 들어 새벽잠이 없어졌다. 새벽 4시에서 5시 사이에 어김없이 눈이 떠진다. 잠을 청해도 여간해서 잠이 오지 않는다. 이리저리 뒤척이다 자리를 차고 일어선다. 잠시 멍한 상태로 아직 깊은 잠에 빠진 세상을 바라본다. 따뜻한 커피를 한잔 마시면 온몸의 신경이 조금씩 깨어난다. 그렇게 또 하루 ‘새날’을 맞이한다.


수면 문제로 크게 고생한 적이 있었다. 정년(停年)을 맞이하는 해였다. 느닷없이 찾아온 불면증으로 밤을 지새우는 것이 힘들고 괴로웠다.




며칠 잠을 통 이루지 못했다. 시작은 2주 전부터인 것 같다. 잠자리에 누웠는데 잠은 오지 않고 정신이 점점 또렷해졌다. 신기한 경험이었다. 잠을 청하기 위해 조용한 음악을 듣기도 하고, 일어나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기도 하는 등 온갖 방법을 다 동원했지만, 결국 한잠도 이루지 못하고 아침을 맞았다.

아침 일찍 밥 한술 뜨고 휘청이는 걸음으로 학교에 출근하여 혼미한 상태로 하루를 보냈다. 몸과 정신 모두가 무척 피곤했다. 당연히 잠도 잘 오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웬걸, 그날도 온 밤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보냈다. 길고 괴로운 시간이었다.


이것은 가히 내게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어릴 때부터 나는 잠이 많았고, 근래까지도 자리에 누우면 10분 이내에 잠에 빠져들었다. 이런 내가 불면증이라니.

이 상태로 며칠을 지내다 학교 근처의 병원을 찾았다. 잠을 못 이룬다는 말에 의사는 일시적 현상일 수 있으니 너무 걱정 말라며 수면제 처방을 해주었다. 연 3일을 수면제를 먹고 잠을 청했다.

이렇게 살 수는 없는 일이다. 평생을 수면제에 의존해 살 수는 없지 않은가?


학교를 조퇴하고 정신건강과 의원을 찾았다. 의사가 요즘 무엇 때문에 우울하거나 불안한 것이 있냐고 물었다. 특별한 것은 없는 것 같았다. 한 가지 있다면 퇴직 후 미래에 대한 약간의 불안감, 그리고 생에 대한 약간의 허무함. 그러나 그것이 나에게 잠을 못 이룰 정도는 아니었다.


“글쎄요? 잠을 못 이룰 정도의 불안은 없는 것 같습니다.”

“무슨 일을 하세요?”

“학교 교사입니다.”

“힘들지 않으세요?”


곰곰이 학교생활을 되돌아보았다. 심상(尋常)하게 지냈던 나날이 힘든 현실로 인식되었다. 학교에 출근하는 발걸음이 그리 가볍지 않았다. 수업을 해도 아이들의 집중도가 별로였다. 어떨 때는 마치 모노드라마를 하고 있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사람들과의 관계가 예전만큼 활발하지 않다. 미래를 자신했지만, 그것은 내면 깊숙이 잠재된 나이가 드는 것의 서러움, 더 나아가 이렇게 인생이 끝나나 하는 비관적인 생각을 감추기 위한 허세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울컥해진다.


“몇 가지 검사 좀 해 볼게요.” 하며 의사는 몇 가지 설문 용지를 네게 건넸다. 불안과 우울에 관한 검사 용지였다. 나는 열심히, 정직하게 설문지를 채워나갔다.

설문지를 본 의사가 말했다.

“감정적인 문제는 아닌 것 같네요. 불안 증세도 크지 않고.”

“뭐가 문젠가요?”

“좀 지켜봐야 알겠지만 갱년기 증상의 하나로 불면증이 올 수도 있으니 너무 걱정 마세요.”

의사가 몇 가지 약을 처방해 주었다. 그리고 이 말을 덧붙인다.

“너무 조급하거나 불안해하지 마세요.”

“네, 감사합니다.”


나는 한 손에 조제해 준 약 봉투를 달랑 들고서 병원문을 나섰다.

거리는 활기차고 상긋한 햇빛이 내리고 있었다. 참으로 우울한 기분이었다. 나름 열심히 살아왔다고 자부했는데, 이렇게 인생이 저무나 하는 생각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사람들 사이를 부대끼며 한참을 걸었다.

버스가 왔다. 올라탔다. 오후 한때, 버스 안에는 승객이 별로 없었다. 빈 좌석에 깊숙이 몸을 뉘었다. 눈길을 창밖으로 돌렸다. 거리의 풍경은 눈에 담은 사이도 없이 빠르게 흘러갔다.

그렇게 세월을 보냈나 보다. 즐길 여유도 없이 서두르며 살았나 보다. 그렇다고 무엇 하나 이루어 놓은 것도 없는데.


늦은 밤 잠은 여전히 오지 않았다. 밖은 어둠이었다.

어둠을 배경으로 유리창에 예순이 넘은 초로의 아저씨가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 아저씨가 내게 말했다.

“나이를 인정해라. 몸의 변화를 받아들여라.”


나이를 인정하기로 한다.

정년(停年), 직장에서 물러 나도록 정해져 있는 나이. 이제 인생의 또 한 구비를 넘어야 할 때인가 보다. 늦은 나이에 시작한 교직 생활도 이제 끝내야 한다. 그리고 다시 갱(更). 그래, 다시 인생이 시작된다. 정년은 끝이 아니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 시기이다. 익숙한 길을 벗어나 또 다른 길을 걷어야 한다. 아직 걸어야 할 길이 있다는 사실이 감사하다. 정년이 곧 갱년임을 굳게 믿었다.


몸의 변화도 받아들여야겠다.

젊음은 시간은 지났다. 60년 이상을 사용했으니 몸의 이곳저곳이 고장 나는 것은 당연하다. 하나하나 고치며 살아야겠다. 유리창에 있는 조금은 낯선 얼굴을 마주한다. 눈가의 주름은 더 깊어졌고, 피부는 어딘가 생기를 잃은 듯하다. 세월의 훈장쯤으로 받아들이기로 한다. 아직도 쓸만한 몸이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고마운 일이다.


유리창에 비친 초로의 아저씨가 빙긋이 미소를 보냈다. 비로소 나를 인정하기로 한다.




정년퇴직한 지 벌써 3년이 지났다. 수면 패턴이 지금은 많이 안정되었다. 그렇다고 예전과 같은 수면 습관을 유지하는 것은 아니다. 요즘도 자다가 한두 번은 꼭 깬다. 그리고 새벽에 눈을 뜬다. 수면의 질은 내가 생각해도 별로 좋지 않다. 그러나 이것도 그대로 받아들인다.


퇴직 후 직장도 새로 잡았다. 비록 기간제이지만 일할 수 있어 너무 좋다. 건강검진에서 다행히 위암을 조기 발견하여 수술을 하였고, 수술 후 급격히 떨어진 신체 능력도 이제 거의 회복이 되었다.


정년은 지난날의 나 자신에게 고생 많았다고, 수고했다고, 그렇게 조용히 스스로를 다독이며 새로운 길로 떠나는 시간이었고, 갱년기은 나를 이해하고, 나를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준 시간이었다.


오늘 하루 펼쳐질 ‘새날’에 대한 설렘이 있는 새벽을 맞이할 수 있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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