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한 언쟁이 있었다.
태양은 제 세상을 만난 듯 지상의 모든 것을 녹일 태세다. 서너 걸음만 걸어도 등허리에 땀이 밴다.
전정 작업조가 사철나무의 가지를 다듬으면서 앞으로 나가면 정리조가 흩어진 나뭇가지를 쓸어 담고 도로를 깨끗하게 정리한다.
다들 땀을 흘리며 작업에 열중이다. 조금 속도를 내어 일을 하면 점심시간 전에 끝낼 수 있다.
“아, 이리로 쓸어서 모아요.”
나뭇조각을 모아 쓰레기 포대에 담던 김 씨가 빗질로 쓰레기를 모으던 황 씨에게 말했다. 말투가 살갑지는 않았다.
황 씨가 냅다 소리를 질렀다.
“하고 있잖아요!”
김 씨도 지지 않고 받아쳤다.
“누가 뭐래요. 이리로 모아 달라구요.”
“아이 씨팔! 니가 뭔데 이래라 저래라야.”
말이 험하게 나왔다.
“아니 저번에도 그러더니 또 그러네. 얼마를 더 참아야 해.”
황 씨가 씩씩거리며 말했다.
성미가 조금 급한 김 씨는 작업 도중 동료들에게 이래저래 말이 많긴 많았다.
“아이 씨팔, 더러워서 못 해 먹겠네!”
김 씨도 삽을 팽개쳐 버리고 자리를 떴다.
사람들이 모여 집단을 이루면 갈등은 필연적 현상인가 보다.
갈등은 칡[葛]과 등나무[藤]를 의미하는 단어다. 칡과 등나무가 서로 까다롭게 얽혀 있으면 그 둘을 떼어 풀어놓기가 매우 어렵다. 이른바 ‘갈등’이 발생하는 것이다.
칡과 등나무는 숲의 무뢰한이다. 숲 가꾸기 작업을 하는 사람들에겐 칡과 등나무가 너무 밉다. 그것들은 숲을 망치는 게릴라들이다. 수종(樹種)을 가리지 않고 접근해 둥치를 감아 올라간다. 공손히 감아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숨통을 조이면서, 둥치의 영양을 빨면서 감아 올라간다. 수백 년 된 소나무도 이들의 공격을 받으면 몇 년 내에 고사(枯死)한다.
칡의 뿌리는 식용으로, 넝쿨은 바구니나 소쿠리를 만드는 데, 꽃은 차와 술을 만드는 데 사용했다. 한의학에서는 칡의 뿌리와 꽃을 각각 갈근(葛根), 갈화(葛花)라는 약재로 쓰며, 발한·해열 등의 효과가 있어서 한의학에서는 감기에 대해서 갈근탕이라는 처방을 한다. 칡넝쿨은 길고 상당히 질겨서 산악용 밧줄 용도로 많이 사용된다.
등나무는 꽃이 크고 화려하며 은은한 향기로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식물이다. 한여름의 푸른 잎은 넉넉한 그늘을 만들어 주기 때문에 공원이나 정원에서 그늘막 쉼터의 조경 소재로 많이 활용되고 있다. 등나무는 잎과 꽃을 먹을 수 있다. 새순은 등채(藤菜), 꽃은 등화채(藤花菜)라고 하는데, 삶아서 나물로 무쳐 먹거나 약술을 담아 먹는다. 잎은 염료로도 쓰이며 줄기는 질기고 탄력이 있어 바구니, 의자 등 가구를 만드는 소재로 쓰인다.
칡과 등나무는 각자 존재할 때는 괜찮은 의미와 쓰임이 있다. 그러나 그 둘이 엉키면 대책불능이다. 이른바 갈등이 발생한다. 전쟁을 비롯한 모든 재난은 갈등의 산물이다. 갈등을 해소하는 법, 적어도 최소화하는 길이 우리 앞에 놓인 책무다.
어색한 침묵 속에서 작업은 계속되었다.
“자, 밥 먹고 마저 합시다.”
점심시간을 알리는 노 반장의 목소리에 우리는 작업 도구를 한쪽으로 정리하고 식당으로 달려갔다.
김 씨가 미안하다고 먼저 손을 내밀어 화해를 청했다. 황 씨가 김 씨의 손을 잡았다. 둘은 악수하며 서로 미안하다고 했다.
나이가 지긋한 양 씨가 한마디를 했다.
“일할 때는 입을 다물고 제 할 일만 묵묵히 하면 돼.”
5년의 세월을 기간제 근로자로 일하며 터득한 지혜인 듯하다.
성격도 다르고 일하는 스타일도 다른데 서로 이래라저래라 하면 기분이 안 좋아지는 게 당연한 것 같다.
다름을 인정하면 칡은 칡대로 등나무는 등나무대로 잘 살 수 있지 않을까?
실제 칡과 등이 서로 엉켜 있는 모습은 보기 힘들다. 칡은 칡대로, 등나무는 등나무대로 자기 삶을 살고 있다. 칡과 등이 엉킨 것을 찾아보려고 여러 날 산을 헤집으며 다녀보았으나 찾질 못했다. 그래서 ‘숲에는 갈등이 없다’라는 엉뚱한 제목을 붙였다.(이우상, 숲에는 갈등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