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 좀 빌립시다.
낙화를 보며 잠시 잠겼던 상념을 깨트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 한 사내가 서 있었다. 계절에 어울리지 않게 무거운 옷차림의 사내는 커다란 배낭을 메고 있었다. 사내는 한 손에 담배를 들고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죄송합니다. 담배를 피우지 않습니다.
아, 그래요.
사내는 잠시 만지작거리던 담배를 주머니 속으로 집어넣고 내가 앉은 벤치의 끝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하필 여기야, 하는 야릇한 생각이 스쳤다. 외모에서 나는 그를 판단했다. 그들과는 눈길을 마주쳐서도 안 되고, 말도 섞어서는 안 되는, 나와는 다른 세계에서 사는 존재이다. 이것이 노숙인에 대한 나의 생각이다.
나는 애써 눈길을 그에게서 돌리고 다시 허공의 벚꽃에 시선을 집중시켰다. 묘한 냄새가 집중을 방해했다. 자리를 옮길까, 하다가 그것도 민망한 거 같아 조금 견디기로 하였다. 못 견딜 정도의 역한 냄새는 아니었다.
곁눈으로 흘낏 보니 사내도 벚꽃에 취해 있는 듯했다. 그러더니 무슨 생각이 났는지 고개를 돌려 주위를 한번 살피더니 내 쪽으로 몸을 틀어 말을 꺼냈다.
여기서 연희동이 멉니까?
연희동이요?
네, 연희동.
글쎄요. 그리 멀지는 않은 것 같은데... 교통편은 제가 잘 모르겠습니다.
아, 네.
대화는 거기서 잠시 끊겼다. 사내는 배낭을 주섬주섬 뒤지더니 메모 쪽지를 꺼내 유심히 보더니 메모를 소중하게 접어 다시 배낭에 넣는다.
나는 문득 저 배낭에 무엇이 들었는지 궁금해졌다. 내 편견일지 몰라도, 길에서 지내는 사람들을 한결같이 큰 배낭을 메고 다닌다. 그럴 수밖에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필요한 물건을 항시 소지해야 하는 유랑의 삶이니까.
내가 궁금한 것은 그들의 필수품이 무엇인가 하는 거였다. 기회가 없어 나는 아직 그것을 확인하지 못했다. 나는 용기를 한번 내 보기로 했다.
실례하오만 선생은 배낭에다 뭘 담고 다닙니까?
사내는 내 질문에 화들짝 놀라며 배낭을 끌어안고 주위를 살핀다. 예상치 못한 사내의 행동에 내가 무슨 큰 잘못을 저지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죄송합니다. 별 뜻은 없었습니다.
당신...누구요?
네?
누구요? 어디 소속이요?
아, 이런 개떡 같은 질문이 있나. 부동산 중개업을 그만두고 백수로 지낸 지가 육 개월이 넘었는데 어디 소속이라니.
나는 그냥... 하다가 말을 끊었다. 내가 이런 말도 안 되는 질문에 답을 할 필요까지는 없는 듯하였다.
실례했습니다, 하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잠시만요.
사내는 한두 걸음 떼려는 나를 불러 세웠다.
정말로 나에 대해 모르는 겁니까?
이런 빌어먹을. 생전 처음 본 노숙자를 내가 어찌 안다고 저 지랄인가. 짜증이 밀려왔다.
내가 댁이 누군지 어찌 압니까? 나는 그냥 노숙자들은 무얼 가지고 다니나 궁금해서 한번 물어본 것뿐이요. 그게 기분 나빴다면 사과하지요.
아, 그렇군요. 요새 시국이 워낙... 내가 하는 일이 있어 이해해 주시오. 이리 와 잠깐 앉으시지요.
그는 경계를 풀고 나를 굳이 자신의 옆자리로 불러 앉혔다.
내가 좀 위험한 일을 하고 있어서 신경이 예민했나 봅니다.
그는 다시 한번 주위를 둘러보더니 내 곁으로 바짝 다가와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 사실 집행인이요.
집행인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가까이 앉으니 더욱 역해지는 그의 냄새가 나의 미간을 찌푸리게 하였다.
이번 건만 잘 해결하면....
그는 나에게 굳은 의지의 표정을 보였다. 나는 엉덩이를 들어 그에게서 조금 떨어져 앉았다. 역했던 냄새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집행인이라고 들어보셨소?
글쎄요. 무슨 집행인지...
여러 가진데, 이번 건은 청소요. 그냥 지상에서 존재를 없애버리는.
그가 덤덤하게 말했다. 나는 비로소 사내의 얼굴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얼굴의 잔주름은 수염으로 덮여 있어 나이를 분간할 수가 없었다.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작은 몸집으로 봐서 힘이 다부질 것 같지는 않다는 것이었다.
혹시 평창동 회장 부인 실종사건 아시오. 흐흐. 경찰 자식들 평생을 찾아봐라. 시체를 찾을 수 있나. 그거 내 작품이요. 아 그리로 아직도 범인 못 잡았죠, 거 뭐냐 신길동이던가... 주택에 불 나서 두 명 죽은 거. 그 외에도 많죠. 젊었을 때 내가 전국에서도... 지금 것들은 다 쪼무래기들이래서.
평창동 회장 부인 실종사건, 나는 모른다. 수십 년 동안 신길동에 불난 집이 한두 채이겠는가. 여하튼 말로만 듣던, 소설이나 영화에서만 접했던 살인청부업자를 눈앞에서 보다니, 감개무량이다. 그런데 그 살인청부업자가 소설이나 영화 속 이미지와는 천양지차, 나이는 모르겠지만 중늙은이의 노숙자라니. 감동이 어이없음으로 바뀌는 시간은 찰나였다.
그는 사뭇 들뜬 목소리로 말을 주절거렸다. 그의 무용담은 앞뒤가 서로 어그러져 일관된 줄거리를 형성하지 못하였지만, 그는 아랑곳없이 여러 살인사건과 실종사건을 내게 들려주었다.
이 좋은 실력도 나이가 드니까 불러주는 데가 없어. 미련한 놈들. 그런데 진짜 오랜만에 의뢰가 하나 들어왔어. 연희동 그놈. 그놈만 잘 처리하면 다시 예전 명성을 찾을 수 있을 거야. 이보슈, 댁도 알거요, 연희동 그놈은 말야.....
가슴팍에서 누군가가 나를 찾는다는 떨림이 전해졌다.
어디쯤이야
친구였다.
어, 여기 사직공원. 잠시 벚꽃에 취해 쉬고 있다.
바람도 없는데 벚꽃이 휘날리고 있었다.
꽃이 지는 것은 바람 때문이 아니다. 그러니 바람을 원망하지 말아야겠다.
세상은 푸르러 가고 꽃잎은 지고 있다. 떨어지는 꽃잎은 푸르러지는 세상을 어떤 감정으로 바라볼까?
사내 때문에 끊겼던 상념이 다시 떠오른다.
빨리 오라는 친구의 재촉을 들으며 나는 통화를 끝냈다. 사내는 나의 통화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듯 멀뚱히 인왕산 쪽을 보고 있었다.
젊었을 때는 말입니다...
사내는 다시 말을 이어가려 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에게 말을 건넸다.
잘 됐으면 좋겠습니다. 진심입니다.
사실 조금 전까지 나는 그를 과대망상증 환자이거니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진심으로 그가 성공하기를 바랐다.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젊은 날의 화려함이 없다면 어두워지는 밤을 어떻게 견딜 수 있겠는가.
공원 입구를 빠져나가며 뒤를 돌아보니 젊은 날의 무용담을 들어줄 사람을 잃은 사내는 자리에서 일어나 벚나무 아래에 서 있었다. 떨어지는 꽃 속에 자신을 묻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 모습이 쓸쓸해 보였다.
친구의 가게는 아파트 상가 2층에 자리 잡고 있었다. 친구는 배달을 주로 하는 아르바이트 직원 한 명과 함께 가게를 운영하고 있었다. 배달은 종종 있었으나, 가게를 방문한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주문의 사이사이는 우리의 잡담과 술잔으로 채워졌다. 이야기에는 세월의 흔적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함께 공유했던 시간도 있었고, 각자가 간직한 시간도 있었다. 누더기 같은 시간이었지만 그래도 간혹 반짝이던 순간도 있었다. 그 순간을 간직하고자 눈을 지그시 감으면 흑백의 사진이 천연색의 선명한 영상으로 바뀌었다가 눈을 뜨면 터지는 비눗방울처럼 일순간에 사라졌다.
밤늦은 시간 달빛을 안고 휘청거리며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 날, 늦게 잠을 깬 나는 버릇처럼 일어나자마자 휴대폰을 찾아 인터넷에 접속했다. 이리저리 뉴스를 뒤지는 중 단신으로 처리된 기사 하나를 발견했다.
경찰이 연희동 전 대통령의 집 주위를 서성이던 한 남자를 잡아 조사 중이라는 기사였다.
떨어지는 벚꽃에 가려 점점이 지워져 가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