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늘도 낡은 소설책을 읽는다

한 장씩 넘기는 일상

by 김제숙

오래된 도시 피렌체.

메디치가의 부와 명예와 권력이 몇세기 동안 풍미하던 곳이다.

일행들은 유명하다는 가죽제품들을 쇼핑하기에 여념이 없었지만 나는 별로 흥미가 없었다.

한 시간 가량 주어진 쇼핑 시간, 가게를 나와 명품숍들이 즐비한 골목길로 들어섰다.

열 두 시간을 날아간 곳에 사는 사람들도 우리와 다를 바 없었다.

세계 각처에서 온 남자들은 여자들곁에서 서성대고 역시 세계 각처에서 온 여자들은 명품 쇼윈도우를 기웃거리고...

나도 그 여자들의 대열에 합류했다.

한 곳에서 발을 멈추고 몇 장 사진을 찍었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웨딩드레스의 젊은 시절은 아스라이 멀어져 가고, 이제 세상을 한바퀴 돌아서 오는 시간들을 기다리며 사진을 찍는다.

시간들의 풍경...

풍경들의 시간...


며칠 전 결혼기념일을 지냈다.

중년부부의 결혼생활은, 이미 수도 없이 읽어서 결말을 훤히 알고 있는 소설책 같다.

내 소설책은 통속일까 명작일까, 잠시 생각해보았다.

아직 내다버리지 않았으니 명작이라 우길까?

서재의 책을 정리하면서 오래되어 빛바래고 낡았지만 마음에 드는 것은 먼지를 털어 다시 책장에 꽂아두었다.

황순원의 신들의 주사위, 김승옥의 육십년대식, 이제하의 초식, 조세희의 난장이 마을의 유리병정, 최인훈의 광장, 박완서의 나목...등등

명작은 오래 남지만 통속처럼 신나고 재밌지는 않다.

그러나 읽을 때마다 다가오는 느낌은 다르다.

작년에 다시 읽은 《위대한 게츠비》는 십 대 때 읽은 것과 판이하게 달랐다.

그 소설이 왜 영미문학의 고전으로 부동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지 알 수 있었다.

우리가 살아내는 삶도 다를 바 없다.

페이지 마다 밑줄 좌악 그을 수 있는 구절이 있어서 다시 들여다볼 수 있는 그런 삶은 명작이 아닐까?


요절한 시인은 '인생은 외롭지 않고 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다는 사실을 일찌기 간파했다.

외롭지 않으려면 '통속' 할 것!

그러나, 오히려 외로움을 즐기며 어슬렁거리다가 찍은 이 사진은 내 첫 책의 표지로 사용했다.

나는 오늘도 낡은 소설책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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