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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제숙 Oct 16. 2020

철수와 영희에게 고함

2020.10.16.금

아침 일찍 일어난 김에 매거진 손바닥소설 <철수와 영희>에 짧은 소설 하나 올리고 잤다. 내가 잠시 자는 사이 내 브런치에 난리가 났다. 조회 수가 막 달리고 있는 중이었다.

그전에 매거진 <여기까지>에 영천 오일장에 대한 글을 올렸을 때도 이랬다.그래도 영천 오일장은 사진도 찍고 글도 공이 많이 들어간 작품이다.


그런데 오늘 올린 것은 그전에 짧게 써둔 것에 살을 좀 더 보태서 후다닥 쓴 것이다. 그렇다고 대충 쓴 것은 아니다.

나는 아무래도 재능이 있는 쪽이 아니라 노력하는 쪽이다. 세상의 부부 이야기는 꼭 써보고 싶은 얘기다. 부부 문제에 관한한 나는 많이 보수적인 편이다. 그런데도 주위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부부를 만나면 나는 그만  찢어지라는 조언을 많이 다. 자녀를 위해서도 불안보다는 결핍이 낫다고 생각해서였다.


그런데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철수와 영희>는 '검은 머리 파뿌리까지'의 슬로건을 깔고 있다. 바꿔봐야 달라질까, 차라리 바꾸는 노력으로 그냥 사는 게 낫지 않을까 계몽 중이다.

내가 알고 있는 부부의 이야기는 한계가 있다. 소재 찾기에 골몰한다. 이사올 때 90프로의 책은 처분을 했는데 그 분서갱유의 참화 속에서도 살아남은 박수동의 <신혼행진곡>, 이상호의 <갈비씨와 유우머>를 눈에 불을 켜고 정독 중이다. 발행일을 보니 40년이 된 책이다. 며칠 전에는 강춘의 <우리 부부야, 웬수야>도 사서 읽고 있는 중이다.



사회의 모든 문제는 가정의 붕괴, 가족의 해체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아이가 어리면 아빠나, 엄마, 아니면 할머니나, 할아버지라도  누구 한 사람 온전히 가정을 지키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아이가 밖에서 돌아오면 그 아이를 맞아줄 사람이 있어야 한다. 아이들이 열쇠를 목에 걸고 학원을 전전하다가 밤이 되어서야 집에 돌아와서 엄마, 아빠와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쓰러져 자는 삶은 미래가 어둡다.

그렇지만 살다보면 중간에 헤어지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편협한 시각으로 볼 일도 아니다. 사람으로서의 존엄을 훼손당하면서까지 함께 살아야 할 필요는 없다. 불안보다는 결핍이 낫다는 생각은 여전히 유효하다.

내가 농담처럼, 해프닝처럼 영희와 철수 이야기를 쓰고 있지만 사실은 웃픈 현실에 마음이 아프다.

사회를 움직이는 것은 남자들의 역할이 클 것이다. 그러나 그 동력이 어디서 나오는지 -건강한 모성성이다 - 는 곰곰이 생각해볼 문제다.


철수와 영희는 서로 한눈팔지 말고, 헛발질 하지 말고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 그게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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