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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제숙 Nov 22. 2020

느리고 고요하게

2020.11.22.일

아들네 가는 길이다. 한 달에 한 번 가겠다고 했는데 이번엔 한 달이 넘었다. 큰 행사를 치렀고 연달아 장례식 두 군데, 결혼식도 있었고 남편의 정기검사와 결과를 보느라 바쁜 날들을 보냈다.



아들네 가서는 단순무식하게 일주일을 보낼 참이다. 손주 등하원 시키고, 저녁에 아들이랑 밥 먹고, 하루는 며느리랑 시간이 맞으면 겨울 옷 두어 벌 사러갈 참이다.
지난 추석에 왔을 때 남편이 며느리에게 옷을 좀 제대로 입고 다니라고 했었다. 나도 신경이 쓰이기는 했는데 암말 않고 있었더니 성미급한 남편이 언질을 했다. 다행히 며느리가 잘 알아들은 듯 했다. 얼마전 가욋돈이 생겼는데 남편이 이번에 가면 며느리 옷을 사주라고 했다. 사주는 것도 어려워 며느리에게 어떠냐? 물었더니 다행히 좋아라 한다. 친구에게 이 얘기를 했더니 둘 다 돈을 못버는 것도 아닌데 너무 오버하는 것 아니냐고 염려한다.

요즈음은 며느리들도 힘들다고 난리지만 우리 시어머니들도 그에 못지 않다. 어느 집 며느리가 집에서 밥을 안해먹을 거라

며 혼수를 해오면서 밥솥을 안사갖고 왔단다.  
밥솥이라는 게 단순히 밥의 의미로만 작동되는 게 아닌 우리 세대로서는 그걸 그냥 넘기기가 어려워 밥솥을 하나 사주었단다. 결과는 밥솥 사주고 아들 이혼 당하게 생겼단다. 시어머니가 신혼생활을 간섭한다고 며느리가 펄쩍 뛰었다고 한다. 내가 설마?, 하는 얼굴을 했더니 실화라고 친구가 정색을 한다.

나도 무엇이든 며느리의 결재를 맡는다. 아끼는 패딩이 있는데 며느리가 입으면 어울릴 듯 해서 사진을 찍어보내고 입을래?, 물었더니 좋아라 한다. 생각이 다 다르니 서로 조율할 시간이 필요할 터이다.

오늘부터 토요일까지 모든 알람을 다 끌 참이다. 느리고 고요하게 일주일을 지내고 싶은데 잘 될런지 모르겠다.
좀 전에도 아들네서 마실 커피콩을 손으로 갈다가 도저히 못참고 결국 분쇄기로 눈 깜짝할 사이에 드르륵 갈아버렸다. 느리게 살기는 너무 힘들다. 고요하게는 그나마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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