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을 살아가면서 속도에 현기증을 느낄 때가 있다. 처방은 한 가지, 여행가방을 꾸리는 것이다. 그렇다해도 자주 여행을 할 수 있는 여건이 되지않아서 증상의 발현을 나름 조절하기는 한다.
지금 창 밖에는 비가 내린다.
그날도 갑자기 비가 내렸다. 퇴근 시간이었다. 나는 버스에 갇힌 채 비오는 로마의 퇴근시간 무렵의 시간 속에 있었다. 손에는 카메라를 들고.
속도에 매몰되지 않는 이런 시간들이 나는 좋다. 다른 물리적인 여건에 의해서라도 속도에 떠밀리지 않는, 내 노력이 전혀 개입되지 못하는 얼마간의 시간들...그 시간들을 찾아서 나는 열두 시간을 비행해 왔는지도 모른다.
내가 상담하는 사람들은 시간의 소중함을 간과하고 있는 경우가 잦았다. 함부로 사용하고, 낭비하고 있었다. 대부분 사람들에게서 상처를 받긴 하지만 좀 더 들어가면 현재를 제대로 충실하게 살지 못해서 빚어지는 일들이 많다. 현재의 시간을 소중히 여길 줄 안다면 주위에 있는 사람들과의 유대도 좀더 유연해진다.
내가 건강한 시간을 갖고자 노력하는 이유다.
사람의 마음을 돌보는 일은, 내가 반듯한 자세와 넉넉한 마음으로 서 있는 것이 제일 우선되어야 한다.
여행은 내 마음의 불순물을 제거하는 일이다. 눅눅하고 오염된 마음을 꺼내 햇살이 만지게 하고 바람이 건들게 해서 다시 보송보송해지면 그때가 돌아가야 하는 시간이다.
버스는 여전히 멈춰서 있고, 나는 비 오는 로마 거리를 내다보고 있었다.
그때 어두운 골목길에서 빨간 우산이 걸어나왔다. 그녀는 좀 특별한 외출인듯 보였다. 통통 튀는 스타카토 걸음걸이였다. 순간적으로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들리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콧노래라도 부르는 듯 느껴졌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얼마 후, 첫번째 사진전을 열면서 이 사진도 걸었다. 마음이 가라앉을 때 들여다보면 좋을 듯 싶었다. 사진이 팔렸는데 구입자는 뜻밖에 초등학교 일학년 남자 아이였다. 엄마를 따라왔다가 무슨 연유에선지 이 사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아이의 엄마가 기꺼이 사진값을 지불했다. 음악을 하는 아인데 무엇이 보이냐고 물었더니 불빛처럼 보인다고 했다. 아이에게 좋은 에너지로 다가갔으면 하는 바램이다.
오랜 인생길, 마음을 바닥까지 내려놓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이렇듯 한 장의 이미지로 시간 여행을 떠난다. 지금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