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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제숙 Jul 01. 2016

시간의 퍼즐 한 조각...shall  we  dance

불러오기 할까요?

나는 이미지를 중요시하는 편이다. 그래서 사진을 즐기는지도 모르겠다. 무슨 일을 시작하려면 그에 관련된 이미지를 먼저 생각한다.

지중해 연안을 여행할까 마음 먹고서 그 쪽빛 바다빛깔의 가방을 사서 옆에 두고 늘 지중해를 떠올리곤 하는 식이다.


몇 해전, 백화점에 갔다가 당장 입지도 않을 원피스 하나를 샀다. 무늬가 좋았고 천은 하늘거리는 쉬폰이다. 무엇보다 폭이 넓다. 120°는 될 듯.

학창시절 <로마의 휴일>에서 오드리 햅번이 입고 나왔던 폭넓은 후레아 스커트가 우리로망이었던 걸 감안하면 이 원피스에 함몰된 마음이 이해가 갈 것이다.

이 옷을 사면서 낯선 여행지에서 챙 넓은 모자를 쓰고, 샌달을 신고 나풀거릴 꿈을 꾼 건 아니었다.

차라리 기억해낸 것은 '춤'이었다.


오래전, 아버지는 한 잔 하시고 늦게 오시는 날엔 늘 양 손 가득 먹을거리를 사가지고 오셨다. 호떡이나 군고구마, 만두, 찐빵, 겨울이면 빵게를 커다란 종이 포대에 한 가득 사기도 하셨다.

우리는 자다가 느닷없이 일어나 그것을 다 먹어치워야했다. 아버지는 기분 좋다고 흥얼거리시고 어머니는 돈이 얼만데 그렇게 써버린다고 아버지께 잔소리깨나 하셨다.

그렇게 잠에 취한 채 잔뜩 먹고 그 자리에 쓰러져 자곤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거짓말처럼 그 기억은 말짱 사라져버리고 없었다.

가끔은 밤참을 먹고 나서 하는 일이 하나 더 있기도 했다. 엄마는 질색을 하셨지만 전축을 틀어놓고 아버지와 춤을 추었다. 아버지 발등 위에 올라가서 음악에 맞춰 방안을, 마루를 빙글빙글 돌았다. 나는 사실 그때 밤참보다 춤을 추는 것이 더 좋았다. 젊은 아버지는 아직 학교도 들어가지 않은 어린  딸에게 "아부지는 슬프다" 혼잣말처럼 하시곤 했다.

아버지의 작은 즐거움도 내가 학교에 들어가고, 시골에 사시던 할아버지 할머니 삼촌들과 살림을 합치면서 끝이 났다.

그때 아버지는 왜 그리 슬프셨을까.

형제가 많은 가난한 집의 장남의 자리는 그리 만만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저 짐작일 뿐이다.

내가 결혼을 해서 첫아이를 낳고 얼마되지 않아서 아버지는 멀리 떠나셨다.


그런 아버지를 향한 그리움에서였을까, 아니면 나도 슬픔을 알아가고 있어서였을까? 신혼시절,  춤하고는 전혀 친하지 않은 남편을 일으켜 그의 발등에 발을 얹고 춤을 추곤 했다. 조막만하던 계집아이의 발은 손바닥길이 보다 더 커졌다. 그것도 아이들을 키우고 사는 일에  골몰하느라 잊어버렸다.


오랜 세월이 지나고 백화점에서 잃어버렸던 시간의 퍼즐 한 조각을 찾아냈던 것 같다. 원피스를 사서 옷장 한 쪽 구석에 넣어두었다.

시간은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또 흘러갔다.

올 여름, 이 원피스를 꺼내 눈에 띄는 곳에 걸어두고 영화를 두 편 봤다.

<shall  we  dance>

내 생각에는 1996년에 만들어진 일본 원작이 낫다. 감정을 섬세하게 짚어냈다. 부부의 보이지 않는 불안과 조바심을 조금씩 보여주며 영화를 끌고 갔다.

2004년에 리메이크된 것은 주인공의 실패인듯 싶다. 리차드 기어에 마음뺏겨 집중이 안된다. 무료한 일상, 메너리즘에 빠진 회사원과 리처드 기어는 줄긋기 불가다. 시험 문제로 나온다면 함정이다. 그리고 순 헐리우드식 마무리여서 공감이 어렵다.

사소한 갈등, 어찌할 수 없는 일탈에의 고민.
그 시기를 건너고 있는 나도 예외가 아니다.

내친 김에 이너웨어 수준의 빨간 원피스도 마련했다. 밖에 입고 다닌다면 보는 사람들에게 민폐가 되겠지만 남편은 아주 좋아할 듯 싶다. 새로울 것도, 신기한 것도 없는, 매사가 심상한 요즘...창 가로 달빛이 흥건히 젖어오는 밤이면 와인 한 잔 마시고 "가족끼리 이러시면 안됩니다." 낄낄거리며 남편의 목에 팔을 두르고 moon river를 흥얼거리며 슬슬 스텝을 밟아볼까?

내가 꿈 꾸는 도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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