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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제숙 Jul 21. 2020

기념일을 대하는 두 부류의 인간

2020.7.21.화


아버지와 오빠, 남편과 아들.

이 네 남자는 내 인생에 등장한 - 으흠 아버지는, 내가 아버지의 인생에 등장한 거지만, 아무튼 - 중요한 인물이다.


나는 무슨 일이건, 날이건 의미 붙이기를 좋아한다. 아버지의 영향이다.

대가족의 맏며느리였던 엄마는 그저 치열한 생활인이셨다. 글쓰는 것 외에  별로 문화적인 것을 좋아하지 않으신 엄마는 한량 기질이 다분했던 아버지를 대신해 꿋꿋하게 가정을 지켰다.

어린이 날이면 우리들에게 짜장면과 전기구이 통닭을 사주신 분도 아버지였다. 서울 다녀오신 기념, 첫눈 온 기념, 전축 산 기념, 생신 기념, 월급 탄 기념... 아버지는 온갖 것에 다 기념을 붙이셨다. 요즘 같으면 아주 연애를 잘 하셨을 것 같다.

   

결혼을 하고 보니 세상에는 두 종류의 인간이 공존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기념일을 기념하는 인간과 기념일을 묵념하는 인간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인간은 환경에 적응하는 동물이라는 것도 빠르게 터득했다.

기념일을 기념하는 인간은 훨씬 삶이 풍요롭다. 인간을 인간이게 한다.


지금 여기까지 나를 있게 한 것은 사실 엄마의 힘이다. 우리 엄마는 영천에서 알아주는 부잣집 셋째 딸이었는데 그저 체면과 허울만 있는 가난한 양반가문으로 시집을 오셨다. 그때부터 엄마는 ‘굳세어라 금순아’로 사셨다. 작은 체구였지만 한평생 대단한 에너지로 삶을 일구셨다.

그럼에도 나는 엄마보다 아버지를 더 자주 기억한다. 사람은 누구나 일상의 삶에서 건져 올린 한 장의 장면을 추억하기 때문이다. 기념일을 기념해야 하는 이유다.

결혼과 동시에 나는 기념일을 묵념하는 인간들 속에 살게 되었다. 하루아침에 별천지에 던져진 나는 처음에는 온갖 노력을 해보았지만 곧 마음을 접고 셀프기념모드로 산지도 꽤 오래되었다.  

  

그런데 올해는, ‘아는 형님’이 나를 갑자기 백화점으로 불렀다. 생일 다 되어가지?, 하며 원피스와 구두를 사주었다. 도저히 사양할 상황이 아니어서 감사히 받았다. 그동안 내 행실(?)을 보고 꼭 선물을 하고 싶으셨단다.    

오래 살아남았더니 이런 일도 있구나, 감격하고 있는데 남편이 올핸 윤달이 있는데 내 생일이 7월에 있느냐고 묻는다. 그러다가 달력을 보더니 아하, 아이들이 휴가로 다니러 오는 때네, 하며 좋아라 한다.

“밥은 아들보고 사라 해야겠다.” 한다.


이 황당한 시츄에이션은 뭐지? 젊은 시절, 만 원짜리 열 장만 주면 하루 종일 셀 정도로 돈을 모르던 남자가 험한 세월을 살아내느라 참 황폐해졌구나, 불쌍한 생각이 든다. 기껏 밥 한번 사는 게 다이면서 돈 굳었다는 환한 표정이다.

그래, 내가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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