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장씩 넘기는 일상
도서관에서 크림튼과 에곤 실레의 미술 강의을 듣고 집으로 오는 길.
할일이 많은 나는 요즘 자주 일의 우선 순위에 대해 생각한다.
책을 읽거나 강의를 듣는 것, 여행을 하는 일은 급하진 않지만 중요한 일이다.
하지 않는다고 해서 당장 표가 나지는 않는다.
그러니 그 시간들이 다른 일에 치이지 않도록 신경을 써서 안배해 두어야 한다.
기밀을 누설하자면 학창시절 수학을 싫어해서 수학공부는 맨 나중으로 미뤘다.
그랬다가 늘 맨땅에 헤딩으로 시험을 쳤다.
창 밖 풍경에 마음을 빼앗겨 자동차를 세우고 사진 몇 장을 찍었다.
내가 좋아하는 분홍이다, 핑크가 아니고.
예전에 이런 색 두루마기가 있었다.
꽃분홍 새색시 시절의 이야기다.
나이들면 다시 어린아이의 색으로 돌아간다더니 정말 그런가 보다.
유치찬란한 이런 색이 좋다.
세상은 온통 색깔들의 향연이 펼쳐지고 있는데 표현할 말들을 잃어버렸다.
시공부를 시작한 나는 요즘 내 속에 말들이 차기를 기다린다.
내가 놓쳐버린 말들이 제발 간 길을 되돌아서 나에게 돌아오기를 바란다.
그 말들이 드디어 한 편의 시가 되어 나오기를...기다려도 될까?
너무 어려워 주눅이 들어 있다.
아, '꽃은 또 저렇게 피고 지랄이야'
이게 내 어록이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이미 섬진강 시인이 써먹어 버렸다.
대신 사진으로 그 억울함을 달랜다.
사진을 찍고 집에 와서 보니 맨 마지막 사진이 마음에 든다.
어렴풋이 드러난 길.
우리가 살아가는 길.
꽃이 이렇게 말 하는 것 같다.
"우리는 우리 길을 갈테니 당신은 당신 길을 가세요."
하루에 너댓시간 밖에 자지 못하는데도 해야 할 일은 좀처럼 줄지 않는다.
오늘은 마음을 다잡고 옷을 헤쳐가며 찾아 입어야 하는 생활에서 기필코 벗어나리라, 서재의 책을 삼분의 일은 내보내리라 마음 먹었는데 열어놓은 창으로 소리도 없는 것이, 보이지도 않는 것이 옆구리를 타고 올라온다.
무심한척 창문으로 밖을 내다보며 기어이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정말 어쩌라고 꽃은 또 저렇게 피고 지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