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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구 사는 까만별 Aug 20. 2022

천의유봉




1.

사락사락 또각또각.

잘 걸쳐진 예쁜 옷에서 소리가 나면, 나의 여정은 뚜벅뚜벅 담대해지며 마음은 폴짝폴짝 가벼워왔다. 성인이 되고나서 입은 꽃무늬 원피스는 나를 지켜주는 갑옷처럼 느껴졌다.


막내였던 나는 어린 시절 늘 옷을 물려받아 입어야 했다. 큰 언니가 입고, 작은 언니도 입고 나서야 차례가 돌아온 의류들은 확실히 나를 위한 게 아니었다. 그 시절엔 넉넉지 않는 살림이었으니 어쩔 수 없었어도, 깊은 곳의 내 마음은 괜찮지 않았나 보다. 나는 예쁜 것을 아주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다 자라서야 알 수 있었다.


성인이 되어서는 내가 원하는 옷들을 골라 입을수 있어  좋았다. 모델이 입어서 예쁘다는 이유로 바지를 샀다가 후회한 적도 있고, 그때는 잘 입었어도 지금 생각해보면 촌스러운 경우도 많다. 그래도 당시 나에게는 원하는 옷을 골라 내 옷으로 삼을 수 있다는 자유가 가장 기쁜 사유였다.


시간이  지나 마흔이 되었을 때 즈음 내 옷은 나의 내면을 반영해주었다. 패셔니스타는 아니어도, 옷에게 의사권이 생기기까지 적잖은 과정이 있었다.




2.



나는 명화에 나오는 예쁜 숙녀들이 좋았다. 그렇다 보니 지금 옷장을 열면 원피스와 블라우스, 스커트가 나를 기다린다.


원색이나 꽃무늬 같던 20대와 30대를 지나, 40대 중반부터는 기본적인 무채색의 옷들이 주로 나를 지킨다. 검은색 민소매와 하얀 치마로 피아노처럼 입기도 하고, 한 획으로 이루어진 원피스를 입기도 한다. 특히 검정은 언제 어느 장소에서도 깔끔한 원만함으로 시크하게 나를 도와준다.

검은색 도화지 위에서는 작은 액세서리들이 옹기종기 함께 할수있는 장점이 있다. 스카프나 하얀 진주 목걸이 아니면 원색의 가방도 평소와 달리 어우러지는 소리를 내며 나와 함께 걷는다.


조금 더 시원해지면 트렌치코트를 입을 시기를 기다린다. 간절기가 줄어드는 요즘은 코트들이 밖에 자주 못 나간다. 장식 요소가 적은 베이지 원피스 위에 진한 베이지색 트렌치코트를 입으면 가을을 입은 느낌이 난다. 좀 더 편한 자리에는 원피스 대신 청바지에 티셔츠를 입어도 좋다. 외출복으로 바지를 입는 몇 안 되는 순간이다.


내게 가장 잘 어울리는 스타일을 찾기까지, 많은 옷들이 나를 지나갔다. 지나간 옷들이 있었기에 현재 정착한 옷들과 새로 구입하는 옷을 후회하는 일이 줄었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옷은 체온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라고 말했다. 하지만 나에게 옷은 그렇지 못하다. 옷장 안에 옷들이 나의 삶을 보여주기 위해 나를 둘러싼다.

그저 옷이라 불릴 수 없는 옷의 가치...

오래전 두 언니가 입고 세 번째로 입던 그 시절의 옷들과, 카메라에 담긴 수많은 시행착오들 위에 오늘의 옷장이 있다.

나를 감싸주던 알록달록한 옛것과 무채색이 된 새것이 길거리를 새로이 한다. 채도가 사라져간 이유는, 어쩌면 생기를 잃어서가 아니라 과거의 모든 색을 다 합쳐 흰 빛을 얻었기 때문이었다.








P.s

이 글은 저의 옷장이 궁금하다는 어느 작가님 댓글에서 출발하였어요. 평소 다루지않던 소재라 낯설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덕분에 평소 옷장에서 저를 기다리는 옷들의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었습니다. 여태 저와 함께 길을 나서온 옷장의 전사들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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