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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구 사는 까만별 Nov 15. 2023

전지적 작가 시점




전지적 작가 시점이지만, 글 밖에서의 나는 단연히 전지전능하지 못합니다. 작중인물의 마음은 알아도 사람의 온전한 마음은 알기 어렵고, 인물이 어떤 사건을 겪을지는 알지만, 나의 반나절 뒤도 알지 못하니까요. 그러니 나에게 있어, 전지적 작가 시점은 지극히 작고, 편협한 창문일 뿐입니다.     


 오늘 나는 운전석과 조수석이 아닌 뒷좌석에 앉았습니다. 앞 좌석에서 익숙한 목소리의 친구들이 부드럽게 문장들을 주고받습니다. 잠시 나의 대사를 줄이고 책가방 대신 등산 가방을 멘 여인들을 나의 구도틀로 응시합니다. 두 친구의 뒷모습처럼 주고받는 일상의 농담들. 세세하게 아름다운 것을 찬미하고, 아름답게 세세한 것들을 누리는 자연스러운 그들의 언어. 뒷좌석으로 자연스럽게 스며들며 모두 유의미해집니다. 

여인의 뒷모습에서 순간적으로 버스를 타고 등교하던 두 쌍의 푸른 날개가 햇살에 녹아납니다.  

    

오늘 세 명의 등산객은 금을 주으러 갔습니다. 골드러시를 맞은 광부는 아니지만, 가을 끝자락에서 오롯이 금빛으로 타오르는 산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자동차는 굴러갑니다. 금을 보고도 가져가지 않고 자연에 돌려줄 마음인 걸 보니 광부보다는 낚시꾼에 조금 더 가깝겠습니다.     


 투명한 사각의 유리막은 깊은 가을 속으로 점점 진입합니다. 고속도로를 오르자 신호등 대신 다른 도시의 이정표가 깜빡이며 자유를 안내합니다. 차창을 사이에 두고 점멸등은 붉게 물들었다 꺼지며 풍경과 피조물을 싣고서 세월로 이동합니다.     


 산허리를 휘감으며 한참을 오르던 차가 마침내 우리를 목적지에 데려다주었습니다. 발끝을 세우고 굽이굽이 바람을 쓸던 낙엽들이 외지인을 반겨줍니다. 낙엽이 쓸어준 산길을 따라 들어가자, 소문대로 금광이 펼쳐졌습니다.

 알록달록 물들어가는 도심 가로수와 달리 부드러운 능선으로 이뤄진 이곳 산 중턱에 금빛 물결이 출렁입니다. 넘실넘실 억새가 수줍게 춤을 추는 만추의 축제. 봄여름의 숙제를 끝낸 가을 여인들은 오늘 끝없이 펼쳐진 축제의 장으로 입장합니다. 마치 지금껏 무사히 걸어온 것을 보상받는 것처럼, 수줍게 응원하는 금빛 사이로 끝없이 걸어갑니다.     


 철쭉 같은 봄날은 침묵으로 잠시 교대하고, 억새 같은 가을이 이 산의 수문장이 되었습니다. 눈꽃의 은은함으로 찾아온 마음들을, 억새가 부드러운 하늘빛 아래서 흔들며 아낌없이 반깁니다. 이제 나는 두 손을 꺼내 들어, 엄지와 검지를 펼치고 눈앞에 사각형을 만듭니다. 작은 사각형에,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세상이 담겨갑니다.

 차르르 바람을 가르는 소리, 스르르 마음을 부르는 고요의 소리...

 산자락에 녹아드는 소리는 늦가을을 더디게 노래합니다. 공허한 초원에 촘촘히 터를 잡은 억새가 내는 음악소리에, 친구들과 나는 들판에서 자꾸만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그러다 점점 고개를 숙이다 보니,

어느 순간 방문객을 올려다보는 억새와 같은 키가 되었습니다. 매일 다른 등산객을 맞이하는 가을의 억새는 어떤 모습으로 같은 장소에 정주하고 있는 걸까요? 철쭉보다 낮은 채도로 빛이 나는 억새를 만나고자 찾아온 등산객. 같은 가을을 맞아 하얀 머리가 나기 시작하는 것을 친근히 노래하는 것이 억새의 언어인가 봅니다.


 억새는 그렇게 노래를 하다가 자기만큼 고개를 숙여 자신의 노래를 듣는 세 중년을 말없이 올려다봅니다. 구도틀이 없어도 팔이 없는 억새는 하얗게 빛을 모아 말없이 우리를 찍어주었습니다. 애초부터 메모리에 저장되지 않아 지울 수가 없는 세 명의 단체 사진이 머릿속에 각인되어, 금빛나는 그 산을 어느새 그리워하고 있나 봅니다.








p.s   구도틀 없이도 우리를 찍던 억새를

동시에 찍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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