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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구 사는 까만별 Jan 30. 2024

메텔의 눈이 우수에 젖은 건, 어른이 되었기 때문이다



# 이 글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괴물’과 미야자와 겐지의 ‘은하철도의 밤’을 경유하였습니다.     


인간이 풍경을 소유할 수 없다는 것은 덧없는 축복일 터입니다.

차창 밖으로 휙휙 스치는 풍경들이 수시로 기차 안으로 고개를 들이밉니다. 빼곡한 실내공기를 훔치고 달아나도 우리는 가만히 지켜볼 수밖에 없습니다. 갓 쪄낸 시루떡처럼 논둑 위로 솟구치는 뜨끈한 김에도, 꿉꿉한 어둠 속을 달리느라 먹먹해진 귀를 쓸어내리며 점점 커져가는 유년의 동공에도, 내가 관여할 수 있는 것은 무엇도 없습니다. 관여할 수 없다는 건 미련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축복이나, 살아가면서 영원히 채워지지 않을 갈증을 향해 평생을 달려야 한다는 선로의 허무한 그림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수없는 기차를 타고 내렸지만, 기차는 어차피 끝내 완주하지 못할 것입니다. 어릴 때의 설레던 마음도, 밤에 귀가하던 나를 위해 총총 박힌 별들도 아직 기차에서 내리지 않은 채 여전히 여행 중일 겁니다. 언제나 차창을 내다보는 홍채에는 변화가 없습니다. 그러나 기차가 터널에 들어오자, 홍채를 둘러싼 얼굴은 어느덧 낯선 중년의 여인의 형상을 합니다.


 주변을 돌아보니 시곗바늘처럼 쉼 없이 달리는 기차의 실내는 무심하도록 평화롭습니다.  어린 시절의 나를 닮은 딸아이가 내 옆에 잠이 들어 있습니다. 나는 풍경 위로 무엇을 보냈을까, 딸아이의 이마 위에서 나의 과거가 조금씩 펼쳐집니다.

    


 어릴 적 생채기 날 줄 알면서도 상처를 만들며 놀던 좁은 골목들과 어머니의 습윤한 밥. 엄마 품만 쳐다보다 설렘으로 순순히 들어가던 학교라는 거대 조직. 사회라는 시스템 속으로 끌려 들어가기까지 우리는 반드시 사람처럼 살 것을 매일 세뇌당했을지도 모릅니다. 수업 시간 조용할수록 찐득사탕에 점점 입이 막히고, 먹거리와 장난감을 넣어주던 가방에는 어느 순간 감당할 수 없는 무게의 책들이 두 어깨를 짓누릅니다. 책의 무게는 수험 성적의 무게와 같아, 그렇게 시스템 속으로 들어가길 열망하는 어른이 되어 갑니다.  

   

 부조리한 세상을 느끼고 인정하기까지 입에서 단내 나도록 속풀이 하던 뒤엉킨 시간이 허공에 부유합니다. 아이가 어른으로 매일 성장하기까지, 끝없이 달리는 기차 속에 있다는 건 터널을 수시로 드나드는 것임을 깨닫기까지, 그 터널들에도 결국 끝이 있고, 결국 모든 게 덧없다는  기까지...

 한 아이가 어른이 되기 위해선 얼마나 많은 슬픔을 겪어야 하는 걸까요.


 인생의 반환점 이상 돌았지만, 저는 아직도 기차의 나침반 방향을 모른 채 살아갑니다. 지나다가 윤슬이 어린 푸른 강빛을 만나도 좋고, 가장 아름다운 나이가 박제된 초상화들이 걸려있을 초록 햇살이 부서지는 숲 속을 잠시 헤매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터널의 끝이 보입니다. 도시의 불빛이 보이고, 잠에 든 아이를 깨워야 할 시간입니다.     


 어떤 사람들이건 터널 속에 들어가면 괴물처럼 보이기도 하고, 햇살아래서 웃고 있으면 천사처럼 보일 터입니다. 기차에 내려 점점 무거운 짐을 들 아이에게 우수의 표정을 숨기고 힘찬 미소를 짓습니다.


 지금 달빛에 비치는 기차 내부의 낯선 사람들 또한 나와 함께 비슷한 이정표를 향해 달리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 침묵에서도 묘한 따스함이 흘러나옵니다. 역무원의 안내에 따라 기차에서 내렸어도, 나와 딸은 관념 속에서 끝없이 기차여행을 하겠지요.

 순수하고 보드라운 소년 조반니와 친구 캄파넬라가 은하 속 신비로운 기차여행을 떠난 것처럼, 그리고 미나토와 요리가 숲 속을 찬란하게 헤치며 달려가는 것처럼,  

머리의 메텔과 메텔을 닮은 소녀는 조금씩 기차에서 멀어져 갑니다.          









https://youtu.be/agaICvnoWQY?si=Me1C3t9zCmIktIE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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